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두번째 이야기
이장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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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저의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 작성했습니다.

귀한 책을 만났습니다.

15년치의 스케치와 글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두번째 이야기.

전자책을 좋아하는 평소의 저라면 아마 이 보석같은 책의 질감을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새삼 서평의 기회가 소중하게 와닿습니다.




저자 이장희님은, 나고 살아온 서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합니다.

손그림과 손글씨. 날짜까지 더하면 그날의 추억은 종이 위에 고스란히 저장됩니다.

그 추억은 본인에게도, 그 공간을 추억할 타인에게도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울림을 줍니다.

품이 많이 드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이지만, 한장의 사진보다 이 하나하나 그은 선들과 꾹꾹 눌러쓴 글씨들은 시간과, 감정, 사연까지 담고 있는 것같습니다.

작가 부부는 90년이 다된 고택을 고쳐 한옥책방을 운영중입니다.

책방 문을 닫은 고요한 시간, 아내와 툇마루에 앉아 네모나게 오려진 서울 하늘을 바라본다는 작가의 글에서 그 부부의 삶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스케치하며 비워내고, 비운 자리에 풍경을 채우는 그들의 시간을 상상해 봅니다.

언젠가 서울에 가게 된다면 서대문 옥천동 골목 어귀, 시간을 그리는 그 한옥 책방에 꼭 들러보고 싶습니다.


1장. 용산

: 사라진 시간을 기록하다 (적산가옥 이야기)

용산의 뒷골목, 작가의 펜 끝이 머문 곳은 붉은 벽돌과 낡은 나무 창틀이 인상적인 한 적산가옥입니다.

적산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이었던 집을 말한다고 해요.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이지만, 해방 후 갈 곳 없던 우리 서민들에게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곳입니다.

이 그림 속 집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평생을 우리 땅 이름과 한글을 연구해 온 국어학자 배우리 선생님이 이곳에 사셨다고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혼을 지키려는 학자가, 가장 일본 색채가 짙은 집에서 살았다는 사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옵니다.

지금 이 집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평범한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군부대가 있던 용산의 특성상 일본식 가옥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작가가 남겨놓은 당시의 스케치로 용산의 골목길을 상상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2장. 서울로

: 빌딩 숲 속의 500년 (회현동 은행나무)

고가도로가 산책길이 된 서울로7017에는 초록의 물결과 함께, 둘러볼 곳이 많다고 해요.

서울로에는 긴 시간을 한자리에서 지켜본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500년 된 은행나무입니다.

작가의 스케치를 보면 숨이 턱 막히는 초고층 빌딩들이 병풍처럼 나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500년 전에는 흙길이었을 곳이 아스팔트로 덮이고, 거대한 빌딩으로 변했습니다.

은행나무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버린 셈입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요? 화려한 빌딩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그 고목이 외로워 보이기보다, 오히려 더 위엄 있고 든든해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나는 여기서 내 뿌리를 지키겠다."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지칠 때, 이 그림 속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버티는 힘을 배워야겠습니다.


3장. 경강

: 괴물은 떠났고, 역사는 묻혀있다

영화 <괴물>의 촬영지로 유명한 원효대교.

한때 다리 밑에는 영화를 기념하는 거대한 괴물 조형물이 있었지만, 흉물 논란 끝에 철거되어 사라졌습니다. 화려했던 영화의 흔적은 그렇게 지워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욱천교라 불리던 다리는, 만초천교라는 명패를 새로 얻었지만 지금 그 물길은 콘크리트로 복개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이름으로는 남아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그림은 땅 밑에 숨겨진, 우리가 잊고 지내던 서울의 깊은 시간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립니다.


4장. 대학로

: 젊음의 붉은 벽돌 거리

붉은 벽돌 미술관 아르코와 푸른 나무들이 어우러진 마로니에 공원.

서울에서 가장 젊은 공기가 흐르는 곳입니다.

언젠가 15살 내 딸아이도 꿈을 안고 이 거리를 걷게 되겠죠?

김수근 작가는 벽돌이 인간적인 재료라며 특히 애정을 가졌다고 해요.

따뜻하면서 단단한 느낌의 붉은 벽돌처럼, 딸아이의 청춘도 단단하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5장. 신용산

: 아픔이 멈춘 자리에 깃든 고요

신용산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입니다.

용산 철도병원과 위수감옥, 그리고 일본군이 머물던 관사촌 골목까지.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사이에는 그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강제 동원의 역사와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착취의 현장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감옥이었을 그곳.

남겨진 이 공간에는 서늘한 역사의 상처가 깃들어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지난날의 아픔을 조용히 애도해 봅니다.

화려한 신용산 빌딩 숲 사이 용산 어린이정원.

작가는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찾아오는 적막을 두고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고, 따분한 천국이라 표현했습니다.

바쁜 삶 속에서도 언제든 고요해질 정원이 있다는 것, 따분하리만치 평온을 주는 곳이 있다는 건 작은 행복인 것 같습니다.


마치며

이 책은 단순한 여행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빠르게 변하느라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서울의 표정들을,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담아낸 15년만의 두번째 책입니다.

서울에 살지 않는 이방인인 저에게, 이 책은 가장 느리고 가장 깊은 서울 여행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마음만은 서울의 낡은 골목과 한강의 다리 위를 실컷 걷고 온 기분입니다.

숨 가쁜 일상에 지쳐 잠시 멈춤이 필요한 분들에게, 도파민 없는 무해한 휴식이 필요한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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