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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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방학 한 달 동안 문을 닫아야만 하는 뉴욕의 어느 학교 기숙사.

하지만, 이게 왠일인가요?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 추위에 홀로 남아 기숙사를 지키고 있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마린.

과연 이 소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텅 비고 싸늘하기만 한 이 기숙사에 혼자 남아있는 걸까요?

이 소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볼 책은 니나 라쿠르의 《우린 괜찮아》입니다. 표지를 한번 살펴볼까요? 검푸른 바다를 향해 등만 초라하게 보이고 눈물을 훔치는 듯 팔을 올리고 있는 소녀가 바로 주인공 마린으로 보입니다. 헝클어진 침대와 바닥이 뭔가 심란해 보이고 마린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슬퍼보이네요.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워보이는 일러스트와는 달리 책의 제목은 《우린 괜찮아》입니다. 과연 정말 괜찮은 걸까? 뭐가 괜찮다는 걸까? 게다가 '난 괜찮아'도 아니고 '우린 괜찮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걸까요? 점점 궁금해지는 것이 많아집니다.


책의 날개부분을 보니 작가 설명이 나와있고, 절취선인듯 한 칼선이 눌려져 있네요. 아마도 저 부분을 떼어내서 책갈피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앞면과 뒷면에 각각 한 장씩 떼어낼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런 형태의 책은 처음 만나봅니다. 세심한 발상에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동성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신 분 같네요. 그렇다면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퀴어문학일까요?


책의 페이지 안쪽으로 바코드와 비슷한 무늬가 책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자리하고 있는데요. 보기에는 트렌디해 보이기는 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별 의미없이 디자인적인 장치로 넣어놓은 것이라면 성공이네요. 읽는 내내 궁금하면서도 본문 읽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에요.

주인공 마린이 텅빈 기숙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메이블이라는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서인가 봅니다. 그런데, 그다지 달가운 친구는 아닌가봐요.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픔이나 슬픔같은 것이 묻어나는 관계인 듯 싶습니다. 게다가 마린의 외로움을 극대화시켜주는 본문을 만나니 쓸쓸한 느낌이 더욱 크게 느껴지네요.

인간의 무리 속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우리는 지쳐있고 휴식이 없다. 내가 속한 인간의 무리들은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해 부모님 집으로, 탁탁거리며 타는 벽난로 근처로, 혹은 비키니를 입고 산타 모자를 쓴 채 포즈를 취하며 친구들에게 메리크리스마스를 빌어주기 위해 열대의 휴양지로 떠났다. (우린 괜찮아 중에서)


마린과 메이블, 두 소녀는 사실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있던 마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사랑하는 메이블과 그의 가족을 뒤로 한채 이곳 뉴욕으로 도망치듯 옮겨온 것입니다. 물론 메이블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말입니다.


할아버지를 잃기 전에 이미 엄마와도 사별을 하게된 마린입니다. 다시한번 겪게되는 크나큰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마린은 두 다리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던거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모든 걸 끊어버리고 뉴욕으로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책의 문체는 아름답지만, 고요와 적막이 느껴집니다.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회색 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암울했습니다. 전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아련한 슬픔만이 가중되어 가고 있죠. 본문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죠. (우린 괜찮아 중에서)


하루를 마치면 그걸로 잊어라. 너는 네 할 일을 했다. 약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은 피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그것들을 잊어라. (우린 괜찮아 중에서)


줄거리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문장 그 자체만으로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죠. 그 말인 즉슨 누구나 망인을 가족으로 두고 있고, 또 그 가족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들을 생각하면 상처가 된다고 생각해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본문에서는 오히려 상처가 치유된다고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위로해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아쉬움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걸 실수와 어리석음이라고 본다면 그것들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말해 줍니다. 오히려 할 일을 다했음을 격려해주네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편지를 한 통 써야 한 통을 받는 법 (우린 괜찮아 중에서)

책을 읽으면서 제 가슴에 제일 먼저 안착한 글귀입니다. 몇 번 중복되서 나타나는데, 나올 때마다 제 가슴을 후벼파는 글귀입니다. 진실은 묻어두고 버디 할머니를 만들어 놓은 채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정말이지 아련하게만 느껴지네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길고 긴 비행을 하고 난 뒤에야 마린을 만나게 되는 메이블.

뜨거운 포옹도 열정적인 대화도 못하고 그저 담담히 서로가 서로에게 천천히 물들어갑니다.

메이블은 마린을 메이블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겁니다.


하지만, 마린은 선뜻 응하지 않습니다.

마음과는 다른 행동이 마린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국은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이대로 다시한번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나는 나의 외로움이 두려웠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기막히게 속였던가.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기막히게 설득했던가.

난 슬프지 않다고, 난 혼자가 아니라고. (우린 괜찮아 중에서)


결국 메이블은 마린을 설득하는 데 실패합니다.

그렇게 메이블은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메이블은 그렇게 허무하게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이블 마저 공항으로 떠나고 혼자 기숙사에 남아있던 마린은 택시 한 대가 도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학교를 관리하는 관리인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택시에서는 메이블과 메이블 부모님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더군요.

심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기쁨과 안도감이 저를 감싸줍니다.

그동안의 본문이 잿빛이고 회색빛 흑백필름이었다면,

지금부터 펼쳐지는 텍스트는 그야말로 무지개빛 총천연색 컬러빛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특히 메이블의 엄마인 애나 아주머니와 마린이 두 손을 꼭 잡고 나누는 얘기는 기억 속에 한동안 자리잡을 것만 같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 상실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여져 있네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이 외로움을 느끼시는 분, 헤어짐을 겪고 마음이 헛헛해짐을 가득 안고 계시는 분들에게 단언코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퀴어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절대 과하지 않게 들어있어 반감이 있거나 접해보지 않았던 분들도 무리없이 읽어나갈 수 있겠다 싶네요. 5월은 가정의 달인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진정한 가정과, 사랑에 대해 고찰해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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