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옆에 두고 읽어야 할 자습서. 장대하다못해 장황하기까지 한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읽도록 돕는다. 소설의 해설서라고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총체적 작품론에 가깝다.
단지 해설서로 보기보다는 독립적인 신학서적 같기도 하다. <러시아 정교>라는 책을 쓴 저자답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을 ‘인간존엄성’이라 규정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투영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오늘의 삶과 연결짓는다. 바흐친, 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환대’의 정신도 소개하고 저자의 생각도 자세히 서술한다.
철저한 그리스도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기독교적 관점에서 읽는 시도도 있지만, 이 책은 작가의 창작의도, 사상에 최대한 근접하여 작품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인간만세>라는 제목이 자못 식상하지만 그 제목에 이르기까지의 읽기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시작 부분에서 던진 ‘인신’, 호모 데우스라 할 만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에필로그에서 다시 언급하며 마무리 짓는다. 정답보다는 해답을 보여준다.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 이중적인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흔들리며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희망, 인간의 삶에 담긴 신적 속성을 포기하지 않고 발견해내길 응원한다. 그 응원은 맹목적인 낭만성, 긍정주의, 낙관주의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드미트리, 이반이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처럼 고달프지만 결국은 도달하게 될 인간됨의 발견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과 고난이 인간됨을 발견하게 하는 것임을. 누군가를 통해 거듭날 수 있음을.
알료사와 어린 아이들은 우리들을 응원하며 ‘함께’ 외친다.
‘인간만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 만세! -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 석학인문강좌 86
석영중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옆에 두고 읽어야 할 자습서. 장대하다못해 장황하기까지 한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읽도록 돕는다. 소설의 해설서라고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총체적 작품론에 가깝다. 또 단지 해설서로 보기보다는 독립적인 신학서적 같기도 하다. 강추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복음 뒷조사 - 누가복음의 여성관이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 복음서 뒷조사
김영화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혼주의자 마리아>와 자매격인 작품같아요. 성경적 여성관, 페미니즘적입니다.
아쉬움은 흑백이라는 점. 다른 ‘뒷조사‘ 시리즈는 컬러인데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하브루타로 교육하라 -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교육의 기적
전성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 교회 영아부 예배시간에 목사님 설교를 통해 '하브루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말씀을 듣고, 서로 토론하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오늘날 유대인 중에서 뛰어난 인재가 많다는 요지였다.

설교를 들으며, 물음이 생겨났다.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에 새겼기 때문인지, '토론'을 한 것 때문인지. 아마도 목사님의 방점은 '말씀'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브루타'는 '짝을 지어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중요시했지만, '말씀'은 '하브루타'를 위한 '텍스트' 중 하나지 '하브루타'의 본질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성공비결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른 것이기보다는 절대적인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토론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은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유대인의 그 굳건한 믿음은 주입식의 '세뇌'가 아님은 분명한 듯하다. 이건 분명 배울 만한 것이다. '말씀'에 대해,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조금만 의문을 품어도 믿음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근본적인 신앙 토대에 갇혀 있는 오늘의 교회가 배울 점이다.

'하브루타'를 통해 세계 인구의 0.25%에 붉과한 유대인의 노벨상 수상자가 30%내외나 된다고 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세계 정치, 경제, 과학계를 주름잡고 있단다. 그 비결은 역시 수천년간 이어져온 '하브루타'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경 속의 그 답답하고, 완고한 바리새인들은 뭐지? 그들에겐 '하브루타'가 없었나? 무식할 정도로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의 존재는? 분명한 건 예수님은 '하브루타'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성경 속의 유대인은 오늘날의 유대인과는 다른 족속인 것 같다.

그런데 또 궁금한 점은 그렇게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유대인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왜 그들이 장벽을 쌓아 팔레스타인인들을 가두고 통제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것이 오랜 기간 말씀을 '하브루타'로 토론한 결론이라면 더 의아스럽다. '하브루타'의 결과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귀결되어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라없는 민족을 경계하고 핍박하는 것이라면 '하브루타'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나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자녀의 물음에 즉시 답변을 하지 않고, 다시 되물어 자녀 스스로 답을 찾아보게 한단다. 이 책에 나에게 되묻고 있다. 책을 읽고나서 나의 물음에 답을 찾는 것은 내 몫이 되는 셈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정치, 경제적 문제가 아닌 '교육'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하브루타'를 한국 교육의 대안으로 본다. 단지 유대인들의 놀라운 성취 때문이라기보다는 짝끼리 대화하는 가운데 길러지는 언어능력, 대인관계능력, 논리적 사고력이 관계도 좋고, 능력도 뛰어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문제를 열거하며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자녀들과 하루 10분씩 '하브루타'로 대화하고, 밥상에 모여 앉아 '하브루타'를 실천하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공감이 간다. 감정코칭, 인문학 교육, 핀란드 교육, 덴마크 교육, 하브루타까지 교육 문제에 대한 해법은 다르지만, 결국 교육의 지향점은 같은 곳으로 향한다. 그러니 '하브루타'가 전부는 아니다. 저자가 '하브루타' 전문가니 당연하다싶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유대인 교육에 대해 떠받드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던 점이다.

만약 한국 사회에 이민온 유대인이 한국 교육제도에 따르지 않고, '하브루타'를 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이라 할 만한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일부 한국인 가정들도 유대인 가정을 롤모델 삼아 홈스쿨링으로 '하브루타'식으로 교육한다면? 그래서 대학은 커녕 정규교육 졸업증도 없는데도 그 자녀의 삶을 성공한 것이라 부모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무작정 단정하진 못하겠지만, 거대한 사회 구조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하브루타'를 통해 똑똑해져서 일류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고 해서 자녀교육서도 출간해야 '하브루타'를 성공적이라 말하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하브루타'는 한국 사회에서 기형적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하브루타'를 교육의 '방법'만으로 보기보다는 '가치'의 문제로 보면 좋겠다.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가치로서 '하브루타'에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 책에서도 강조하는 지점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상위 1%에 들게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즐겁게 하고 싶은 것을 찾게 하고, 쩨다카 정신처럼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하는 힘을 길러 주는 '운동'으로 자리잡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정도 회복되고, 학교도 회복되고, 사회도 건강이 회복되면 좋겠다.

'하브루타'가 부모에게는 '가정'을, 교사에게는 '학교'를, 정치인들에게는 '사회'를 되짚어 보게 하는 성찰의 만찬이 되길 바란다.
'하브루타'처럼 이 책은 나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좀 답답하다. 나의 '하베르', 즉 하브루타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이 후덥지근해지고 있다. 요며칠 사이에 드디어 에어컨을 가동했다. 야밤에도 선풍기만으로는 더워 '아열대 쾌면' 기능을 사용해 편히 잤다. 집에선 안해의 허락하에 위아래로 러닝과 사각 팬티 한 장씩만 걸치고 다니지만, 그래도 덥다. 홀딱 벗고 있었으면 싶을 때가 여러 번이다. 안해에게 "요즘 같은 날에는 아담과 이브가 너무 원망스러워.^^;" 라고 말했다가 마치 불경한 소리라도 한 모양으로 안해의 핀잔을 듣고 만다. 태초에 그 시절에는 아담과 이브가 벗고 다녀도 서로 부끄러운지 몰랐단다. 죄가 없을 때는. 죄가 들어오고부터는 가리게 되었다지. 자신의 치부, 죄악을 숨기고 싶은 본능이 의류 문화를 발달시킨 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꿈을 꾼 이후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면서부터 그녀는 태초의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만 했던가. 그녀는 자기의 가슴을 꽉 조르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채식만 하고부터인지 그녀는 집에선 아예 상의를 벗고 있다. 퇴근한 남편이 아내의 반나신을 보고는 누가 볼까봐 화들짝 놀라 현관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자해 소동을 벌인 후 병원에 입원하자 밖에서 상의를 벗고 햇빛을 쪼인다. 마치 광합성이라도 하는 듯이.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그녀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영혜는 아내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남편과 결국 이혼한다. 자취방에 방문한 형부가 집에 들어왔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혜를 보게 된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움없이 형부를 보다가 태연히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을 입는다. 형부 앞에서 뒤돌아서지도 않고. 집에선 안 입고 있는 게 편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영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미술 작가인 형부의 은밀한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형부는 처제의 벗은 몸에 꽃을 그린다. 그녀처럼 알몸에 꽃이 그려진, 생판 처음 본 남자와 섹스를 연출하는데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결국 그녀에게 욕정을 느낀 형부가 거칠게 다가왔을 때도 형주를 받아들인다. 형부에게도 꽃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니의 남편과 불륜을 맺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형부를 사랑한 게 아니다. 그저 꽃이 된 자신이 다른 꽃과 어우린 것 뿐이다. 마치 숲 속에 바람이 불어 꽃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부대끼는 것처럼. 채식만을 먹게 된 그녀는 결혼이라는 관습에 대해 아무 의식이 없다. 

  영혜는 이제 채식마저 먹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나무라 여기고 물만 있으면 된다고 버틴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영혜에게 의료진을 어떻게 하든 먹이려 하지만 영혜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점점 죽어간다. 그렇게 태초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인간의 목숨이란, 다른 생명의 희생이 없인 유지될 수 없다. 맛있게 차려진 밥상의 이면에는 인간을 위한 숭고한 죽음이 있고,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생명의 울부짖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얼마나 태연히 맛있게 먹어대는가. 기독교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바로 이 점을 갈파했다. 밥상은 죽음이라고. 그 생명의 희생을 통해 매일 부활을 경험한다고 했다. 먹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먹은 후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들을 짊어지는 책임을 일깨운다. 그러기에 대수롭게 살아서는 안 되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영혜는 죽음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던, 키우던 개를 아버지가 죽여 밥상에 내어 놓자 먹었던 죄책감을 느낀다. 죽어가던 개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힌다.가슴에서 올라오는 생명들의 얼굴들 때문에 먹지 못한다. 한편 채식이라고 해서 생명이 없겠는가. 움직이지 못하고 말은 못하지만 엄연히 생명을 가진 '생물'이다. 물 외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극단적인 선택은 어쩌면 죄많은 '에덴의 동쪽'에서 억지로 서쪽인 태초의 '에덴'으로 향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극단성은 공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혜의 극단성은 생명을 소중히 하겠다는, 어떤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우연히 꾼 꿈에 대한 맹목적 반응일지 모른다. 먹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러니. 어쩌면 그것이 영혜가 처한 삶이었을지도.

  어느 글에서 이 소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는 것이 '폭력'의 일부라면 처음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었을까. 영혜는 그저 물만 먹어도 살수 있는 나무라 생각했다. 일체의 폭력을 거부한 순결함의 추구. 그것이 영혜의 삶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인혜는 고통스럽다.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나 역시 고통스럽다. 결코 이곳에선 그렇게 살 수 없기에. 몸을 던져 태초의 죄없는 곳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 이브. 난 아무리 더워도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 내 알몸에는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죄가 많기에. 죄를 짊어지고 살지만, 오늘의 밥상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난 또 이렇게 진부한 깨달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참고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 
https://itunes.apple.com/kr/podcast/idongjin-ui-ppalganchaegbang/id907144162?mt=2&i=3719660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