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이 후덥지근해지고 있다. 요며칠 사이에 드디어 에어컨을 가동했다. 야밤에도 선풍기만으로는 더워 '아열대 쾌면' 기능을 사용해 편히 잤다. 집에선 안해의 허락하에 위아래로 러닝과 사각 팬티 한 장씩만 걸치고 다니지만, 그래도 덥다. 홀딱 벗고 있었으면 싶을 때가 여러 번이다. 안해에게 "요즘 같은 날에는 아담과 이브가 너무 원망스러워.^^;" 라고 말했다가 마치 불경한 소리라도 한 모양으로 안해의 핀잔을 듣고 만다. 태초에 그 시절에는 아담과 이브가 벗고 다녀도 서로 부끄러운지 몰랐단다. 죄가 없을 때는. 죄가 들어오고부터는 가리게 되었다지. 자신의 치부, 죄악을 숨기고 싶은 본능이 의류 문화를 발달시킨 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꿈을 꾼 이후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면서부터 그녀는 태초의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만 했던가. 그녀는 자기의 가슴을 꽉 조르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채식만 하고부터인지 그녀는 집에선 아예 상의를 벗고 있다. 퇴근한 남편이 아내의 반나신을 보고는 누가 볼까봐 화들짝 놀라 현관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자해 소동을 벌인 후 병원에 입원하자 밖에서 상의를 벗고 햇빛을 쪼인다. 마치 광합성이라도 하는 듯이.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그녀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영혜는 아내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남편과 결국 이혼한다. 자취방에 방문한 형부가 집에 들어왔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혜를 보게 된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움없이 형부를 보다가 태연히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을 입는다. 형부 앞에서 뒤돌아서지도 않고. 집에선 안 입고 있는 게 편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영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미술 작가인 형부의 은밀한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형부는 처제의 벗은 몸에 꽃을 그린다. 그녀처럼 알몸에 꽃이 그려진, 생판 처음 본 남자와 섹스를 연출하는데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결국 그녀에게 욕정을 느낀 형부가 거칠게 다가왔을 때도 형주를 받아들인다. 형부에게도 꽃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니의 남편과 불륜을 맺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형부를 사랑한 게 아니다. 그저 꽃이 된 자신이 다른 꽃과 어우린 것 뿐이다. 마치 숲 속에 바람이 불어 꽃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부대끼는 것처럼. 채식만을 먹게 된 그녀는 결혼이라는 관습에 대해 아무 의식이 없다. 

  영혜는 이제 채식마저 먹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나무라 여기고 물만 있으면 된다고 버틴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영혜에게 의료진을 어떻게 하든 먹이려 하지만 영혜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점점 죽어간다. 그렇게 태초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인간의 목숨이란, 다른 생명의 희생이 없인 유지될 수 없다. 맛있게 차려진 밥상의 이면에는 인간을 위한 숭고한 죽음이 있고,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생명의 울부짖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얼마나 태연히 맛있게 먹어대는가. 기독교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바로 이 점을 갈파했다. 밥상은 죽음이라고. 그 생명의 희생을 통해 매일 부활을 경험한다고 했다. 먹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먹은 후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들을 짊어지는 책임을 일깨운다. 그러기에 대수롭게 살아서는 안 되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영혜는 죽음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던, 키우던 개를 아버지가 죽여 밥상에 내어 놓자 먹었던 죄책감을 느낀다. 죽어가던 개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힌다.가슴에서 올라오는 생명들의 얼굴들 때문에 먹지 못한다. 한편 채식이라고 해서 생명이 없겠는가. 움직이지 못하고 말은 못하지만 엄연히 생명을 가진 '생물'이다. 물 외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극단적인 선택은 어쩌면 죄많은 '에덴의 동쪽'에서 억지로 서쪽인 태초의 '에덴'으로 향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극단성은 공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혜의 극단성은 생명을 소중히 하겠다는, 어떤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우연히 꾼 꿈에 대한 맹목적 반응일지 모른다. 먹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러니. 어쩌면 그것이 영혜가 처한 삶이었을지도.

  어느 글에서 이 소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는 것이 '폭력'의 일부라면 처음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었을까. 영혜는 그저 물만 먹어도 살수 있는 나무라 생각했다. 일체의 폭력을 거부한 순결함의 추구. 그것이 영혜의 삶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인혜는 고통스럽다.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나 역시 고통스럽다. 결코 이곳에선 그렇게 살 수 없기에. 몸을 던져 태초의 죄없는 곳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 이브. 난 아무리 더워도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 내 알몸에는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죄가 많기에. 죄를 짊어지고 살지만, 오늘의 밥상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난 또 이렇게 진부한 깨달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참고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 
https://itunes.apple.com/kr/podcast/idongjin-ui-ppalganchaegbang/id907144162?mt=2&i=371966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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