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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이야기는 날마다 이어진다. 누구의 삶인들 고단하지 않겠는가. 이러니 남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p.35-36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 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p.74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 때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된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연애를 오래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 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p.83-84
가난은 다만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빈곤은 그 결핍을 포함한 소외, 차별, 박탈, 멸시이다. 이 구조는 이제 일상화 되어서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장의 원리이며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작동한 결과라고 설명하는 말들은 힘이 세다. p.170
왜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촛불의 대열 앞에서 펄럭이지 못하는가. p.238
한글을 모르는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정부가 시행한 노인정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보인다. 이 사업은 노인을 보호나 관리, 수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서 그들의 말을 사회적으로 통용시켜 주었다. p.265-266
맛은 인간 정서의 심층부를 형성한다. 삶은 설명될 수 없고, 다만 경험될 뿐인데, 맛 또한 그러하다.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