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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평점 :
진보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발전시켜 왔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진보했을지 모르지만, 그 진보의 종착지가 폐허라면, 이것을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의 미래가 희망적이라면, 화성으로의 이주 같은 이야기는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왔다. 인간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며, 다른 생물들은 인간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진보를 통해 불확정성,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는 ‘진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생태적 공동체라고.
하지만 이런 믿음에 대한 배신을 알아차린 지금,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를 상상해야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경계 밖에서 번성하는 생물종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 밖, 폐허의 땅에 송이버섯이 있다.
1945년에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됐을 때, 폭탄 맞은 풍경 속에서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다고 한다. 무분별한 벌채가 이루어진 곳,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인해 황폐해진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높은 확률로 소나무와 버섯의 공동체다. 우리가 흔히 ‘폐허’라고 부르는 곳에서, 그들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자신들의 삶을 일궈낸다.
송이버섯은 상품으로 재배되지 않는다. 송이버섯은 교란된 환경 안에서 조율과 협력을 통해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이 채집되었을 때에만 상품이 된다. 또한 송이버섯 채집인들의 삶과 유통 방식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틀에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폐허를 자신들의 삶의 무대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 교란, 오염 같은 요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배제되어 온 것이지만 송이버섯에게는 오히려 생존의 토대가 된다. 이들은 확장성 대신 다양성을 선택한 것이다. 저자는 송이버섯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토록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이 속한 환경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생물종의 명민함은 주변의 배치를 알아차리고 조율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오랜 시간 자본주의와 인본주의를 통해 인간을 지구 생물종의 꼭대기에 스스로 올려놓은 인류는, 과연 이제 그 위치에 걸맞은 명민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다종 간 공생의 배치로 눈을 돌리게 되고, 그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폐허의 땅에서 자라나는 버섯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의 폐허를 살아가는 우리는 묘한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