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용서가 지닌 아름다움을 즐겨라"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지혜의 눈을 떠라.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구하라" -쫑카파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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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의 삶에 종교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눈부신 문명의 발달이 진행 중인 이 시간에도 법회가 열리고 있는 다람살라의 전기 사정은 열악합니다. 각자 삶이 지닌 상황에 따른 문명의 척도이겠으나, 실제 주된 삶에서 얼마나 불법을 만나고 사유하는가와 비교해 보면 매우 상대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종교를 통해 자연의 절대로부터 위안과 희망을 찾고자 했다면, 현대는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일부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에 의해 인류는 그들이 원하는 물질적 행복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마음의 불행 역시도 다층화 되었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의 행복을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고 지속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 음악(), 향기(향기), 맛난 음식(), 육체적 관계()들의 정점인 오늘의''가 마음의 평안과 대비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탐욕과 지속적인 불안 그리고 경쟁심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으로는 해결책을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과학과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상관성이 연구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행복에는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의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바람직한 원인을 제공하면서 가능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지로 인해 행복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합니다. 용수보살은. “연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인과연기와 가립연기가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덕적 삶에 과심이 있을까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에 만족하는 바에 의해 판단해 보십시오. 엄밀히 말해, 마음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 , , , 촉의 한 대상을 대하는 바 만족 혹은 불만족 아니면 무관심 등의 다양함으로 세분화하여 인간이 느끼는 행복과 사고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종교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인류는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세밀하게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뇌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마음과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증상생인 것은 동물보다 사고와 지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탄생이 단순하게 육체적 행복의 구현에만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속적 윤리의 핵심은 양심입니다. 선한 마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양심에 비추어 사는 삶 그리고 행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과 더불어 이웃과 진정한 벗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도덕이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심축이 됩니다. 근저에는 이성에 기반을 둔 지성적인 윤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권유합니다.

 저는 윤리와 이타가 인간의 삶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종교를 지닌 이라면 더욱더 종교적인 실천과 수행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사랑, 자비, 인욕, 만족의 공통된 교리를 지닌 종교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용서와 계율입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고 나누는 것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직시하십시오.

 선한 마을을 삶에서 실천으로 구현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봉사 활동이나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이 그 예입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아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붓다께서 무상무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지닌 교리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상통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는 나 자신 스스로가 보호존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가 짖고 받은 것입니다. 행위, 다시 말해 을 통해서, 선과 불선은 지어집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됨을 본질로 한 것이 바로 선업입니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됩니다. 모두가 에 의한 인과입니다. ‘는 오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오온에 의지함이 없이 따로 존재하는 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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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체가 있다면 아집이 생겨납니다. , , 번뇌의 원인이 바로 아집입니다. 나에 집착하는 아집은 악마와 같은 것이며 고통을 끌어오는 근원입니다. 붓다는 상일주제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견해를 반박해 무아를 설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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