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관내분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로그 + 라디오 장례식 + 독립의 오단계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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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SF소설 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과학 용어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수학이라는 과목은 원체 싫어했고, 과학에는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수학과 함께 이과 계열로 묶인다는 개념에 미묘하게 압박당하면서 마음의 거리상으로나 능력상으로나 멀어지게 되었다. 단편 <관내분실> 역시 과학적 용어가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하고 있다. 인덱스 내역, 마인드 업 로딩, 데이터 조각들....... 그러나 이러한 전문적인 용어의 등장에도 평상시와 같지 않게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있었는데 사건이 벌어지는 중심 장소가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서관 내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책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의 데이터로 이식된 영혼이지만. 4학년이 된 후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스스로의 경험에 빗대어 읽으니 훨씬 친숙하고 재미있게 읽혔다.
분명히 정보가 도서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우리 학교 도서관 내에도 분실도서가 몇 권 기록되어 있다.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도서관 업무에 자부심을 느끼는 근로학생으로서, 책을 원하는 학생에게 반드시 그 책을 찾아서 대출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 책이 영영 어딘가에 처박혀서 희석되어 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찾아든다. 책의 분실이 주는 상실감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분실이라니, 딸의 마음이 얼마나 허탈할까.
하지만 딸 지민과 어머니 은하는 돈독한 모녀가 아니었다. 은하의 사랑은 지민에게 그저 집착이며 억지에 불과했다. 은하의 히스테리를 지민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영향일까? 지민은 임신한 아이에게 도저히 모성애가 느껴지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분실된 은하의 데이터를 되찾기 위하여 서투르게나마 은하의 생전의 자취를 더듬어가면서 지민은 비로소 천천히 은하를 이해하게 된다. 지민의 출산 이후 김은하는 사라졌다. 그저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일 뿐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종이책이 사라지듯이 책 표지를 디자인하곤 했던 은하는 사라져버렸다. 48페이지의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형편없는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하고 지민이 생각하는 부분이 참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한때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증거를 남겨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는 모성애라는 굴레가 씌워지면서 자아실현의 기회가 거세 되어버린다는 묵직한 깨달음이 새삼 가슴을 때린다.
중심 장소가 도서관이지만 책이 아닌 죽은 사람들의 영혼 데이터가 보관된 도서관이라는 설정도 좋았지만, 그러한 상상력 이전의 본래의 도서관의 용도를 상기 시키듯이 분실된 데이터인 은하의 직업이 종이책 관련, 표지를 디자인하는 것이었다는 설정 또한 아주 마음에 들었다. <관내분실>의 은하라는 캐릭터는 주인공 지민과의 관계를 통해 모성애라는 고정관념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문제의식도 제공하지만, 과학기술 발달로 인하여 모든 것이 전자화 되고 데이터화 된 세상에서 종이책처럼 잊혀져버린 애틋한 감성의 상징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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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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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리데 옐리네크 작가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피아니스트>로 먼저 접했다. 다소 뒤틀린 사랑과 증오의 형태로 서로에게 얽매어 있는 에리카 코후트 모녀. 편집증적인 어머니의 애정 아래서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에리카는 겉모습만이 성숙한 여인일 뿐 내면은 어린아이의 그것이다. 에리카와 어머니의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들 둘뿐, 두 사람은 다른 누구의 자리도 허용치 않는다.
치밀하고 쌀쌀맞은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피아노 교사 에리카에게 어느 날 다가온 매혹적인 청년 발터 클레머. 그는 빈틈없는 모녀 사이를 파고들고자 애를 쓰며 에리카와 어머니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클레머에게 있어 에리카는 그저 호기심과 놀이와 오기의 대상일 뿐이지만 어머니의 억압 아래서 한 번도 남자라는 존재를 알아본 적 없는 에리카는 그의 거짓된 사랑을 기이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클레머에게 딸 에리카를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힌 어머니는 보다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발버둥 친다.
문학작품을 영화화 하였을 시, 감독의 역량과 각색의 정도, 배우의 전달력과 호소력에 따라서 작품은 훨씬 빛을 발하게 되거나, 퇴색되기도 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피아니스트>는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스토리와 캐릭터 성격에 부합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원작에 뒤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피아노 치는 여자>속 주인공 에리카의 묘사는 다소 체격이 있는 완강한 이미지의 여인으로 그려지는데, <피아니스트>속 에리카를 연기하는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깡마른 몸집에 이성적이고 싸늘한 듯하면서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소녀의 분위기마저 드러내는 중년 여인으로서 에리카의 고독한 처녀성과 불완전한 내면성에 보다 잘 어울리게 되었다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에리카의 과거 회상(수영복을 입은 사촌오빠의 사타구니에 얼굴이 눌리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에리카)이나 에리카에게 거절당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늦은 밤 공원 호수의 백조를 잡아 죽이는 클레머의 모습 등은 각색 과정에서 삭제된 모양으로, 영화 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파멸로 치달아가면서 산산이 부수어져 버리는 에리카의 외적, 내적 경계막 상태를 속도감을 중시하여 추진력 있게 전달하고자 심리적 측면에 비중을 두는 앞서의 장면들을 과감히 제외시켜버린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20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언어에 폭력을 행사하고 학대를 하는 듯한 충격적인 문체가 특징이다. 그러한 파격적이고 강렬한 묘사를 그대로 시각화하고, 영상미라는 또 다른 형태로 바꾸어 보여준 영화 <피아니스트>는 원작 내 핵심인 고통으로 얼룩진 눈물과 처절한 고함을 죽여 버리는 실수 없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여 주었다는 점에 있어 성공적인 콘텐츠의 재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구사하는 문장은 형식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 어조 또한 상당히 격정 되어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의 번역이 까다로운 것은 물론이고 독일 내에서도 읽어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아니스트>역시 다소 난해하고 충격적인 원작을 기반으로 탄생한 영화니만큼 세심한 집중력과 이해력을 요구하고 있으나 텍스트보다는 한 눈에 받아들이기 쉽고 유순한 영상이라는 매체로서 문학 <피아노 치는 여자>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 또한 주고 있다. 콘텐츠의 재생산은 이렇게 상호보완적인 형태로 각자의 역할의 빛을 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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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소리, 다른 방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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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예전에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우리들의 시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망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소설인데 저는 재밌게 잘만 읽어서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의 동생이 트루먼 커포티를 닮은 얼굴이라고 묘사되고 있는데요... 저는 그때 인터넷에 작가의 이름을 검색하여 처음으로 사진을 접했었답니다. 당시에도 미남이시네!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트루먼 커포티의 전집 표지들을 감상하고 있자니 새삼 경탄하는 마음이네요. 어딘가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듯 예민한 눈빛이 마음을 잡아끄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풀잎 하프>를 가장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 책은 그것 한 권만 구매하면 택배비가 붙기에...^^;;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이랑 해서 한꺼번에 두 권을 구입하면 되지 않나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트루먼 커포티의 스타일이 저한테 맞을지 어떨지 몰랐기 때문에 제 딴에는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이렇게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을 다 읽고 나니, 그냥 <풀잎 하프>도 구매할 것을 그랬다,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 나중에 언젠가는 <풀잎 하프>도 꼭 사서 읽기는 할 것입니다! ㅎㅎ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유년시절이 많이 떠올라서 그립고 행복했어요. 조엘과 흡사한 환경에 처했었다, 는 것은 아니지만 조엘의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성장과정을 묘사해내는 트루먼의 문체가 향수를 건드렸다고 봐야 옳을까요? 저는 정말 예쁘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좋아했던 여자애였어요! 그래서 <빨간머리 앤>의 앤이 벚꽃나무를 보면서 하얀 신부를 떠올려내는 발상이 황홀했고 <주홍글씨>에서 주인공의 딸 펄이 산호와 장미 같다는 묘사, 열매와 꽃으로 스스로를 장식한 모습이 숲의 요정 같다는 서술에 흥분했으며 <비밀의 화원>의 메리가 장미덩굴이 우거지는 화원을 가꾸는 과정에 가슴 두근거렸지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에게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저는 세라처럼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우아한 성격의 여자애들보다는 성깔있는 말괄량이 왈가닥 여자애들에게 홀딱 반했답니다!- <소공녀>에서 묘사되는 장밋빛 등갓, 두툼한 케이크, 인형의 레이스 장식 등등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빨려들곤 했답니다. ㅋㅋ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서 좀더 많은 작가들의 좀더 많은 작품들을 접하고, 교수님들께 문학은 아파야 한다, 문학은 소외된 자들의 곁길의 산물이다, 문학은 고독과 죽음이다 등속의 잔소리를 듣다 보니(...) 어여쁘고 아기자기한 묘사보다는 처절하고 어둑어둑한 묘사에 보다 잦게 마주치도록 되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도 질척하고 고통스러운 묘사에 가까운 스타일이죠. 지쳐서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는 개 같은 인상의 인간이라든지, 눈물과 눈곱이 배어나는 누런 흰자위라든지, 오물 냄새가 풍기는 목 매단 시체라든지, 그러한 이미지가 훨씬 선명하게 그려지는 글을 쓰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게 최대 포인트지만...ㅎㅎㅎ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깊어지는 녹색 바다가 특이한 포도주처럼 하늘 위에 퍼졌고, 그늘진 구름이 산들바람에 밀려 이 거대한 녹원 위를 느릿느릿 지났다. (p.40)”라든가 “포도넝쿨처럼 격자무늬로 엮인 별들이 남쪽 하늘을 설탕처럼 덮고 있었다. (p.44)”라든가 “벽에 격자무늬로 어른거리는 무화과 이파리 그림자가 점점 부풀어 올라 해파리의 투명한 살처럼 거대하게 떨리는 형체를 만들었다. (p.80)”라고 하는 묘사들을 읽고 있자니... 숲과 구름과 별과 꽃과 요정, 설탕과 케이크와 보석과 같은 느낌의 단어만 책에서 접해도 들뜨던 어린시절이 퍼뜩 떠올라서 가슴 한 구석이 아득했네요. 장미덤불이라니, 멀구슬나무라니, 라일락과 버찌와 인어 신부와 푸른 계단이라니... 저는 아직도 이런 찬란하고 아름답고 예쁘장한 수채화 같은 묘사들에 쉽게 뒤흔들려 버리는가 봅니다.

<다른 목소리, 다른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가 조엘과 지저스 피버 앞에서 엄청나게 씩씩하게(ㅋㅋㅋㅋ)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노래 부르던 장면이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은 랜돌프! 신경쇠약 증상이 의심되었던 에이미 양도 나름대로 맘에 들었어요. ㅋㅋㅋ 랜돌프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오던데, <소리와 분노>의 퀜틴 양이 생각나더라고요. ㅋㅋㅋ <소리와 분노>도 참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언제가 됐든 꼭 서평을 쓸 것입니다. 랜돌프는 순정적이면서도 어린아이 같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걱정스럽고,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구석이 있는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좀더 자주 랜돌프와 마주치고 싶었는데, 제 욕심만큼 비중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서 아쉬웠어요. 드라우닝 폰드 괴담은 정말 매혹적이지 않나요? 저는 늪과 함몰에도 깊은 관심과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오필리어 같기도 하고... 조엘이 발견한 유령 같은 여자 때문에 전에 읽었던 고딕 소설 <나사의 회전>생각도 났네요. 제 기준 <나사의 회전>은 고딕 소설의 전형이자 교과섭니다. ㅋㅋㅋ 여하튼 사랑을 갈구하는 아름답고 애처롭고 가녀린 소년 조엘의 기이하고 수상하면서도 파스텔 빛깔 그림처럼 부드러운 성장 이야기,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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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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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작가님의 <빅토리아의 발레>를 읽었습니다. :) 원래는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을 생각이었는데... <빅토리아의 발레>가 절판된 작품이더라고요.ㅠ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개학하면 학교 도서관에서도 빌려 읽을 수 있으니,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빅토리아의 발레>를 구입해서 우선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랍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 책 읽는 속도가 느려요. 집중력도 낮은 편이고요.^^;ㅜㅜ 그런데 이 책은 어찌나 책장이 술술 넘어가던지... 그렇다고 한낱 심심풀이로 치부할 가벼운 작품 정도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어요. 작가의 기교와 재치가 탁월하기 때문에, 이토록 가독성이 붙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빅토리아의 아버지 관련 등속, 정치적인 이야기도 나오는 편이었는데요.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한 배경지식도 전무하고 이해력도 약해서 그냥 대강 알아듣는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국가의 부당한 탄압 아래 민주화는 도래하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었던 것 같아요. 빅토리아의 아버지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개죽음을 당하고 말았고요. 힘없고 외로운 국민들은 무력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각자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비열한 강자 앞에 대항하는 약자의 위치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씨만은 참 따스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혈기가 왕성하며 쾌활하고 거침없지만, 쉽게 흥분하고 위태로운 구석이 있는 앙헬은 진실한 사랑을 할 줄 알며 속이 깊고 따스한 면모를 보여주어 저를 감동시켰고 얼음같이 매정하고 무심한 아내와 아들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고독한 베르가라 그레이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정이 많고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앙헬과 빅토리아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비추어졌습니다. 여리고 가냘프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만큼은 강렬한 빅토리아의 곧은 자세에서도 많은 연민과 공감을 느꼈답니다. 이 세 사람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조력자들도 여럿 등장하는데, 이러한 인물 설정을 보면서 작가는 인간미가 있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좀 좋지 않은 버릇이 있는데요. 바로 책을 읽기 전에 줄거리 전체를 거의 다 알아버릴 정도로 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버린다는 것입니다.ㅠㅠ 정작 책을 읽기 시작하면, 자진해서 스토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독서 내내 “괜히 찾아봤다!”고 후회하면서도 그 행동을 반복하고 있어요.ㅋㅋㅋㅋ 이유인즉슨, 불안하다고 할까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나 인물 설정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버리면 그때는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저는 한번 펼친 책은 억지로라도 다 읽어버리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ㅜㅜ) 그전에 저의 취향에 맞는지 어떤지 알아놓자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책의 제목과 표지 그림 정도만 확인하고 펼쳐 읽었던 경험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ㅋㅋㅋ <빅토리아의 발레>도, 읽기 전에 나의 입맛과 완전히 벗어나는 작품이면 어떡하나 불안하여 많은 분들의 서평을 이리저리 다 뒤져보다가 저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결말을 미리 읽어버렸습니다.ㅋㅋㅋㅋㅋ 제 잘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요. 다 알고 읽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는 뭐야?! (저는 책을 읽다가 놀라면 꼭 크게 소리내어 감정 표현을 한답니다.) 라고 외치지 않았네요. ㅋㅋㅋ 몰랐으면 분명히 크게 혼잣말을 했을 텐데...ㅋ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보다도 빅토리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 물론 빅토리아에게는 아버지의 죽음,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의 무관심, 발레에 대한 자신의 열정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경제적 조건 등 많은 상처가 새겨져 있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발레를 위해서라면 그 가녀린 몸뚱아리를 무엇에건 온통 던져버릴 수 있을 만큼 열의가 넘치는 빅토리아를 보면서 나는 치열하게 글을 읽고 쓰고 있는가? 씁쓰름한 자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상황과 서술에 입각한다면 겉모습은 미덥지 못한 망나니의 인상이었을 미소년 앙헬이, 실은 순수하고 올곧은 청년으로, 빅토리아를 정말 사랑해주고 그녀의 꿈을 있는 힘껏 복돋워주고 받쳐준다는 점 역시 저의 부러움을 자극했지요. 꿈과 사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칠레문학은 처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요, 가장 최근에 스페인문학에 대해서 기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칠레문학을 읽었지만 그게 칠레 작가가 쓴 에스파냐어(칠레 언어라고 검색하니까 에스파냐어라고 뜨네요. 그러면 에스파냐어로 쓴 글이겠지요?)로 된 글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해외문학으로 넓게 뭉뚱그려 생각하고 읽었을 겁니다. ㅋㅋㅋ 요즘에야 작가의 출신을 확인하고 어느 나라 문학인지 꼬박꼬박 알아보고 있는데요... <빅토리아의 발레>를 읽으면서 작품 내 언급되어 있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 작가 두 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답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그 분들을 아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도 그 자부심을 바탕으로 집필한 작품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긴 저도 존경하는 작가가 생기니 쓰는 글에마다 그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언급하게 되기는 하더라고요. 지난 학기 과제물에서 오에 겐자부로 이야기를 끌어온 리포트가 대체 몇 개나 되는지ㅋㅋㅋ 경애심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윤택과 고양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괜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작가에게 포근한 친근감을 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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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께스 미스터리
엘리아세르 깐시노 지음, 정창 옮김 / 시타델퍼블리싱(CITADEL PUBLISHING)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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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점에서 <벨라스께스 미스터리>를 구입하기까지... 나름대로 아픈 상처가 있지요.^^; 사실 제가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알라딘 수유점에 갔던 것은...<벨라스께스 미스터리>를 구입하기 위함이 아니었어요...!ㅋㅋㅋㅋ 노나미 아사 작가의 <죽어도 잊지 않아>를 사러 갔던 거랍니다.ㅠㅠ <죽어도 잊지 않아>는 제가 학교 도서관에 주문을 해서 좀 예전에 이미 읽었던 작품인데 독자의 심리를 장악하는 기세가 탁월하다는 후한 평가로 제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새 책을 구입하기에는 정성스러운 재독을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어, 중고로 구입할 생각이었답니다. 검색해보니 서울에 있는 재고라고는 수유점에 있는 것이 전부인데, 상태가 ‘중’으로 표기되어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좀 불안불안 했는데...ㅋㅋㅋㅋㅋ 걱정이 되어 고객센터에 미리 상태 좀 세세하게 봐 달라고 문의까지 넣었습니다.ㅋㅋㅋㅋ 직원 분은 마음속으로 성가신 사람, 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요?ㅠㅠ ㅋㅋ 책장이 변색 되었고 번지지는 않은 검은 얼룩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그 정도면 양호하다, 생각하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더니...ㅜㅜ
우선은 책이 펼쳐보니 비위가 상하더라고요. 변색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 뭔가 글로 남겨 놓기에 민망한(...) 코의 이물질이 묻어 있는 페이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흡...ㅠㅠㅠ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어느 한 페이지가 두 동강으로 갈라질 것처럼 수평으로 좍! 펴지더라고요! 이음매 부분은 쫀쫀해야 안심이 되는데...! 아, 너무너무 속상했어요! 버스비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무엇보다 손에 넣고 싶었던 책이 제 것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힘겨웠던지...ㅋㅋㅋ 참 상실감이 큰 날이었죠. :) 기분이 완전히 잡쳐버려서, 내팽개치고 학교로 돌아와버릴까 생각하다가 발품이 아까워 다른 책이라도 아무거나 한 권 사가자 하고서 고른 책이 <벨라스께스 미스터리>랍니다.ㅋㅋㅋ 이거 고르는 데만도 두 시간은 걸렸을 거예요. ㅋㅋㅋ 기왕이면 중고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절판도서를 사고 싶었기 때문에(그래야 그나마 의미가 생기니까...ㅎㅎ...) 일일이 품절, 절판 여부를 확인하면서 고르다가 발견한 책이 이것이었어요. ㅜㅜㅜㅜ ㅋㅋㅋ 나름 기분이 풀려서 사왔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 책의 표지인 그림 <궁녀들>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특히 개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소년을 언제나 유심히 봐왔는데 이 소년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해서 사왔지요.

소년의 이름을 처음 알았네요. 니꼴라스! 이름도 예뻐요. 고등학생 때 이 그림을 처음 봤는데 친구랑 얘 이쁘다, 하면서 작게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남자애라는 사실을 알고서 한 번 더 놀랐고요. 짓궂은 악동 소년일까? 하고 성격을 상상했었는데... (개를 밟고 있어서ㅋㅋㅋ) 이 책 속의 니꼴라스는 장난꾸러기 소년하고는 거리가 먼 성격 같아요. :) 오히려 신념이 있고, 예의가 바르고, 눈치있게 행동할 줄 알고, 배움과 성장을 중요시 여기는 어른스러운 소년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배움의 기쁨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무기이자 방패가 되어줄 것임을 일찍이 알아차리는 니꼴라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저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제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저는 공부 잘하는 인물들은 굉장히 멋져 보이더라고요. 저는 범접할 수 없으므로ㅋㅋㅋ

게다가 니꼴라스가 단테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괜히 더 반가웠네요. 저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본 적 없지만,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지만,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이 단테와 깊은 연관이 있지요... 오에는 천재가 아닐까요... 저는 도무지 <신곡>같은, 대작으로 불리는만큼 난해하고 지루한 작품을 읽으면서는 영감을 얻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벨라스께스의 미스터리는 이 책에서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었어요. 어렴풋이 짐작, 아니 상상할 수 있겠다, 하는 정도...? 네르발의 정체는 아직도 의문입니다.ㅋㅋㅋ 제가 보건데 악마의 상징 같은 게 아닌가ㅋㅋㅋ 벨라스께스는 대작을 확약받는 대신에 그 악마(네르발)에게 영혼을 계약한 느낌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제 멋대로 끼워맞춘 해석이기는 해요! 그림과 영원성에 대한 욕망과 집착 때문인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생각도 잠시 나더라고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참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아무튼, 벨라스께스의 장례식 장면에서는 거장의 의도했던 계획이 어떤 방식이었는지 조금은 감을 잡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역시 선명하지는 않고 어렴풋한 감각으로 밀려들었지만... 작품의 영속성에 대한 애원과 열망이라면 일개 소설가 지망생인 저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어요. 그래서 벨라스께스의 바람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봉인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니꼴라스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려 말문을 틀 때, 노인 정도는 되었는가 생각했더니 마지막 문장으로 확인하건데 그때의 일로부터 열일곱 살로 성장했을 뿐이더군요.ㅋㅋㅋ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아주 훌쩍 성숙했음을 보여준 니꼴라스... 책 뒤표지에 ‘한 소년의 가슴 아픈 성장 과정’이라는 줄거리 소개글을 읽고는 왜 가슴이 아프다는 걸까? 의아했었는데 책장을 완전히 덮은 지금, 니꼴라스의 삶에 대한 어떤 애환이 얇게, 얇게 가슴을 저미며 저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스페인 문학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예요. 외에도 더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해외문학의 작가와 등장인물 이름을 보면서 국적을 일일이 알아차리거나 확인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마침 <차가운 피부>도 어제 중고매장에서 구입을 했는데요... 저는 삼각형을 참 좋아하기 때문에 삼각형 부분만이라도 가끔 가다 다시 읽고자ㅋㅋㅋ구입하게 되었습니다. :) <벨라스께스 미스터리>도 스페인 문학이네요! 기억해 놓도록 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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