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책을 읽었나?
일단은 여성이 쓴 글에 대한 편애가 좀 있다.
그리고 한 때 아렌트가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악의 평범성” 이란 개념에 적잖이 쇼크를 받은 터라 아렌트의 책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읽었다.
각설하고.....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이 활동적일 때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이다.
그리고 그 활동들이 일어나는 무대로는 사적영적과 공적영역이 있다.
노동은 그야말로 삶 그 자체를 위한 활동이다.
즉, 살아있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만 하며, 그것은 순전히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다.
노동의 결과물은 언제나 자신의 삶과 이후의 노동을 위해 곧 바로 소비되어 남아있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바로 사멸하지 않고 지속성을 갖는 생산물을 만들게 되었고, 그 활동이 바로 작업이다.
만들어진 생산물은 바로 인간이 제작한 인공세계를 만든다.
작업 과정 역시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작업의 결과인 생산물이 그것의 가치를 확보하고 교환되는 곳은 바로 시장이라는 공적영역이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공적인 영역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차이성과 특수성을 드러내려는 활동이다.
인간은 노동하지 않거나 작업하지 않고도 살 수는 있다. ( 다른이들에게 자신의 노동과 작업을 위탁할 수 있다. 예컨대 고대시대에는 노예가 대신 노동을 하였고, 그리고 작업활동에 대해서는 장인들에게 생산물을 제작하게 하고 구입할 수 있었다. )
그러나 행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행위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정치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원성이다.
즉, 각자 특수성을 갖는 개인들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고대에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는 확실한 경계선이 있었고, 시민들은 공적영역에서 자유롭게 정치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중세이후 사회가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을 대신하게 되면서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으로 흡수 되었고, 공적인 영역은 점차 자리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원리에 따라서 작업은 작업인이 생산한 생산물이 소비재가 되어 빨리 소모되고 다시 재생산되어야만 하는 노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철학적 관조 대신 작업 개념에서 도출된 실험이 진리를 찾는 방법이 되었고, 작업과 행위의 위계가 전도되었다.
그리고 작업은 본래 지속가능한 생산물을 만든다는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 현대 사회는 공적영역이 사라지고, 단순하고 자동적인 기능만을 하는 노동하는 삶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렌트는 서문에서 우리시대의 특징을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유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즉, 공적영역을 다시 회복하고 사람들이 그곳에서 정치적으로 행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경제원리의 추구와 과학기술의 맹신은 우리를 점점 사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경제라는 것은 원래 공적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가정이라는 사적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개인의 소유란 부(Wealth) 가 아니라 자기가 거주할 곳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는 소유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유용성과 생산성의 원칙에 따라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만들어 버린다.
노동이란 지극히 개별적인 활동이며 배타적인 활동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노동이라도 그것은 분업의 형태로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방법이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행위는 확실히 아닌 것이다.
작업의 과정인 생산품도 생산성의 원칙에 따라 많이 생산해야 하므로 빨리 소비되어야 하며 더 이상 지속성을 갖는 생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결과인 소비재로 바뀐다.
삶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노동이 아닌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노동은 인간의 활동 중 가장 불필요한 활동이 아닐까.
과학기술의 맹신 역시 실험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것만 진리로 여기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철학적 사유 대신 수학적 방법들을 인간사회에도 적용시키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수학 역시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가?
내가 생각할 때 아렌트만의 특이한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지구 소외”이다.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의 힘을 입어 우리의 토대인 지구를 너머 우주로 진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우주로 이주할 날도 멀지 않았음을 희망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를 폭력적으로 손상시키고도 회복의 노력 없이 우리의 터전을 이제 그만 떠나려고 모색한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가.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아렌트가 행위 부분을 설명하면서 예수의 삶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행위의 환원불가능성(행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대한 치유책으로 예수의 용서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한 행위는 피치 못하게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며 어떤 결과를 야기 시킨다.
이때 용서라는 행위가 없다면 한 행위는 결과는 반복적으로 다른 행위를 야기하고 또 그것은 또 다른 행위를 야기한다.
용서라는 행위는 이전 행위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행위의 시작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다원성의 중심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공적영역을 회복하고 거기서 정치적 인간으로 사는 것.
깊게 사유하고 행위하는 것.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
지구에 배은망덕하게 굴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라 하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좀 더 꼼꼼하게 밑줄도 긋고 맘에 드는 문구는 따로 적어 놓고 하면서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 리뷰는 완전 떠오르는 데로 뒤죽 박죽.
이제부터 아줌마도 공부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