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이 생긴 기념으로 예전에 적었던 글들을 여기에도 옮겨 봅니다.
방이 너무 텅 비어서 썰렁하니 뭐라도 좀 채워 넣어야겠죠? ^^
아래 글은 2008년도에 썼던 건데 좀 오래되긴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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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위해 울랴?
버지니아 울프를 위해서 라기 보다는 그냥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었다.
그녀안의 표면은 잔잔하나 그 속은 용암과도 같은 분노가 내게도 전해졌을 때 였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바로 그 시 말이다.
나도 그랬다.
중 고등학교 시절 연습장 표지에도 그 시가 적혀 있곤 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제대로 의식하며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다닐 때 영화 "올란도"를 보고 나서였다.
엄청난 삶의 시각 변화를 일으켰던 바로 그 영화!
영화 올란도가 소설 올란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한 성에게만 경제와 정치에 대한 모든 권한이 주어질 때 남성과 여성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희망을 이야기한다.
우리세대는 안되더라도 다음세대만큼은 그러지 말라고...
마지막에 어린 딸과 함께 힘차게 질주하는 올란도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잠시 잊혀졌다가 그녀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 을 읽고는 또 심각하게 나의 현재 상황을 고찰해 보게 되었고, 주변 여자 친구들의 삶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절실히 공감했다.
주변을 보니 자기만의 방은 커녕 자기 책상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 특히 주부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다 같이 사용하는 거실 테이블이나 부엌의 식탁이 그들이 무언가를 하는 공간이었다.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 현재 상황으로 어렵다면 제발 자기 책상이라도 가지면 어떨까?
( 참고로 우리 집에서는 내 책상이 제일 크고, 내가 작업 중인 재료들로 가득하다. )
그리고 다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영화 "디 아워스"를 보고서는 감동을 받아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다.
너무나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을 통해 남성 스스로도 피폐하게 되리라는 메세지와 더불어, 그동안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가족과 주변을 챙기며 살아온 부인들에 대한 애정어린 존경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존경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세대의 여성들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댈러웨이 부인의 딸의 모습 속에 들어있다.
소설 "등대로"에서도 유사한 메세지가 반복된다.
가부장 사회에서 가족과 주변을 위해서만 살아온 램지 부인의 삶에 대한 존경과 안타까움이 주로 담겨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여성상인 릴리를 통해 우리에게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가능성과 희망 역시 남겨 놓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너무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버지니아 울프의 호소가 내 마음을 너무 뒤흔들어 놓아 한동안 그녀에 대한 생각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녀의 에세이 "3기니"를 읽었고, 이 책이 내 감정을 폭발 시키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분노와 절망을 내 몸에 느꼈고 그래서 울 수 밖에 없었다.
3기니는 전쟁반대에 관한 메세지이자 여성들의 교육과 전문직 획득을 위한 페미니즘적 메세지이다.
반전운동을 위해 기부해 줄 것을 요청한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의 글이지만, 마치 논문을 쓴 것 처럼 주가 빼곡히 달려있다.
반전을 위해 기부할 수 있는 돈 3기니 중 1기니는 여성대학교육을 위해 또 1기니는 여성의 전문직진출을 위해 그러고 나머지 1기니를 반전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그녀의 주장은, 결국 전쟁이라는 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가 일으킨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들이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대학교육과 전문직진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기존은 남성들이 해 온 방식을 답습하면 안 되고 여성들만의 새로운 방식 이어야 한다는 점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소유와 경쟁이라는 남성적 틀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 말이다.
그녀가 이런 주장을 한 지도 벌써 60년이 되어가건만 그 사이 우리 주변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동안 그녀의 호소에 대해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 침묵으로 대답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의 분노가 내 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침묵에 대한 절망 때문에 시인 박인환은 술병을 붙잡고 이 시를 읊지 않았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박인환시선집>(1955) -
이 글을 쓰며 이 시를 다시 읽으니 시인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되어 슬픔이 또다시 밀려온다.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
나라도 그녀를 위해 울고 그녀를 대신하여 그녀의 분노 어린 호소를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