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성의 마법사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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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출판사에서 보여주는 <호랑이 성의 마법사> 소개를 봤을 때, 여느 로맨스 판타지처럼 공주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책 초반에 나오는 조금은 푸근한 인상의 화자의 묘사에 당황했다. 대머리인데다가 배도 볼록한 공주를 상상하기는 조금 힘들었으니 말이다! 화자는 아나톨로 에스콰베타의 궁중 마법사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에스콰베타는 몰락해가는 국가이다. 이에 국왕은 자신의 딸인 툴리아를 옥사타니아의 달림플 왕자와 결혼시키려한다. 이 결혼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툴리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상대는 견습 필경사 피토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달림플 왕자는 이에 격노하며 피토를 자신과 톨리아 공주의 결혼식 연회에 처형하고, 그 광경을 톨리아가 직접 보기를 명한다.

아나톨에게 있어 톨리아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함께한만큼 딸처럼 소중한 존재이다. 피토에게 자신의 약을 실험하다가 끝내 그와 유일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아나톨은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고, 세 사람의 운명의 시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보다보면 이 이야기가 판타지인지, 아니면 역사에 기반한 소설인지 갑자기 헷갈리는 지점이 온다. 여타 판타지 소설들과 다르게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베네치아, 영국, 프랑스 등 우리가 아는 지역과 국가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점과 교차해서 이루어지는 묘사를 보고 있으면, 승자의 시선에서 기술된 역사 탓에 후대의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역사를 엿보고 있는 느낌이다. 틈틈이 몇 세기 전의 자신을 어리석고 바보같다고 묘사하는 아나톨도 재밌는 부분 중 하나이다.

아나톨의 시선에서 보는 톨리아와 피토는 기억을 잃는 대신 사랑을 택한 사람들치고 어리숙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운명같이 둘 만을 위한 사랑을 하기보다는 투닥거리며 서로를 미워하고, 흘겨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더 현실적이어서, 두 사람이 정말 실존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품의 후반부까지 다 읽고 나니, 나까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아나톨의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의 오랜 친우는 타국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지 못했고, 그랬기에 당대 유명한 뱃사람으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톨리아가 진취적으로 환경에 순응하는 대신 사랑을 택한 이야기는 제멋대로 다시 쓰여졌다. 미천한 신분의 피토는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어떤 이야기는 왜곡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기억하고 사랑하는 기억은 영원하다. 아나톨이 먼 훗날 노예제를 지지한다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소녀의 눈을 보고 톨리아의 호기심과 반항심을 본 것이 그 근거다. 그들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못한 것이 되었지만, 나는 톨리아와 피토는 대양 위에서 멋지게 자신들의 길을 찾았으며, 아나톨이 훗날 발견한 소녀의 두 눈이 그 삶들의 흔적이라 믿고 싶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하는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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