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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꽃다발 법구경 나의 고전 읽기 4
장철문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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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꽃다발'이라는 표현이 딱이다. 조금씩 크기도 다르고 빛도 다른 꽃 여러 송이가 잘 어우러져 보기좋은 한 묶음이 되듯 석가모니의 생존시기 동안 그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짤막한 이야기들이 불교의 진리를 분명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 단순하기조차 한 일화들이 전하는 진리는 얼마나 명확한가. 학자들이 끝없이 늘어놓는 이론적 설명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마음에 잘 와 닿는다.  

부처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리는 어쩌면 그렇게 어렵거나 길거나 추상적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처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수많은 이론서와 계율에 가려진 것인지 모른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필요할 것이다.

책 속에 드러난 석가모니의 모습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 좋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동시대인들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추앙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를 따른다는 사람들조차 그의 가르침을 잊거나 따르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대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분노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릴 뿐. 깨달음은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구나 싶다. 부처는 그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 인류에게 꽃다발 같은 선물을 주고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부처의 염화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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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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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달라고 한다.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사랑을 어떻게 말해 달라는 것일까. 

주인공 슌페이가, 교코를 만나기 전에 했던 연애는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또다른 말들로 그 상처를 덧나게 하면서 끝나버린 관계들이었다. 그야말로 좋은 친구로 남으며 쿨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남보다 못한 냉랭한 말들만 쏘아붙인 채로. 왜 헤어졌는지 이해도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주인공은 내키는 대로 말을 주고 받지 못하는 교코와 지내면서 답답함을 느끼지만 갈수록 그런 상황이 그를 성숙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아니었을까. 그제서야 상대의 느낌과 마음을 짐작해보고, 상대에 아는 것이 많지 않았던 자신의 무심함을 반성하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은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수많은 말들을 뒤로 한 채 그저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진심어린 한 마디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소설 속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런 면에서 제목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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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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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모습은 마치 속세를 떠나 초월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는 도인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어쩌다 성전 안마당을 휘저어 놓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품위있는 말투로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며,  알듯 모를듯한 수수께끼같은 비유로 가르치는 모습에서, 화내고 좌절하고 답답해하고 측은함에 '애끊는' 심정을 절절하게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말하자면 복음서의 행간을 채워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풍습 등을 참고하여 말이다. 덕분에 '마르코 복음'은 공중부양하고 있는 듯한 엉거주춤한 위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여기 우리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이 책에서는 복음서는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쓴 것임을 인정한다. 홀가분하다. 덕분에 복음서 곳곳에서 발견되는 비약과 어색함과 시대와의 불일치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복음서가 좀 불완전하면 어떠랴. 오래전에 쓰인 책들은 다 그렇지 않던가. 동양의 고전들도 분석해 보면 후대의 손길이 많이 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동양 고전이든 성서이든 그 속에 녹아 있는 진심일 것이다. 

때로 복음서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자신의 가족과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단박에 '네!'라 응답하며 실천하기엔, 버리기 아쉬운 게 너무 많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다. '나'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사랑, 전부를 던지는 사랑. 그래서 '나는 예수의 제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는 고백을 함부로 하기 힘든 것이다. 예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 그리고 우리는 말해 무엇하랴! 작가가 여기저기서 비판하는 현대판 바리사이인들은 혹 나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복음서와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겠지.  

물론 작가의 모든 해석에 전적으로 찬성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성서를 우리네 삶과 엮어 풀어내려는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만 풀이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말로는 이웃 사랑을 외치며 가끔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한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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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공부 불변의 법칙 - 아이 공부를 지배하는 21가지 숨은 원리
송재환 지음 / 아마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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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성공을 위한 획기적이면서 새로운 요령이나 방법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누구누구는 모르는' 혹은 '성공한 사람들의' 류의 타이틀이 붙은 책들이 사람들의 눈을 끈다. 수능시험 앞두고 족집게 강사를 만나고 싶어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그런 식으로 특별한 요령을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고득점을 올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초학력이 없으면 요령을 알려줘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응용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그 기초학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게 아니고 몸으로도 하고 마음으로도 하고 교우관계로도 한다는 것도 잊지 않고 짚어준다는 점에서, 어렸을 때 이만큼 공부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망한다고 겁주는 선정적인 제목의 다른 교육서보다 더 유익하다.  

가끔 아이들을 보면 무서워진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원에서, 과외 교사 앞에서 가만히 앉아 문제만 풀어대느라 자기 감정을 조절하는 연습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대화하는 연습도,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여유도, 뛰어다니며 놀면서 체력을 기를 여력도 없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우리 사회가 겁난다. 창의성도 좋고 경쟁력도 좋지만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피폐해진 다음이라면 그런 것들은 모두 사회와 타인들, 심지어 스스로를 해치는 무기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이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야 할 나이가 되어도 자신의 어린시절이 너무 싫어 아예 자녀를 낳지 않으려 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은 '과잉학습'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초등 3,4학년은 방과 후 1시간 정도만 공부하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학부모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 하루 한 시간씩만 공부하는 아이들을 둔 엄마로서 늘 개운치 못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하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이미 5,6시간씩 수업을 듣고 온 아이들에게 3,4시간 이상의 추가 학습을 요구하는게 잔인하게 느껴진다. 입장을 바꾸어 나더러 그렇게 살아보라 하면 일 년을 견뎌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어학학원이나 피트니스센터도 끊어만 놓고 몇 달 못 다니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아이들에게 숨 쉴 시간, 놀 시간, 생각할 시간 좀 주자는 저자의 주장은 그래서 쉽게 넘기지 못할 '상식'이고 '교과서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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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디바리우스
토비 페이버 지음, 강대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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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다보면 종종 같은 곡임에도 남다르게 풍부한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연주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스트라디바리니 과르네리니 하는 악기명들을 듣게 된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어느 유명 연주자들은 대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는 명기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거란 기대에 부풀어 책장을 열었다.

책은 여섯 대의 스트라드들의 지나 온 길을 훑어 내려오며 각 악기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들, 유명 연주가들의 화려한 연주 여행, 거래를 할 때마다 엄청난 이득을 올리는 악기상들의 상술을 들려준다. 바이올린 제작 기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문외한인지라 천천히 의미를 짚어가며 읽어야 했지만, 평소에 즐겨듣던 파가니니, 뒤 프레, 타르티니의 연주나 작품에 대한 일화가 있어 꽤 두께가 있는 책이었음에도 읽는 동안 지루한 줄 몰랐다.

처음에는 장인의 혼과 자부심이 담긴 작품이었다가, 명 연주자와 환상의 짝을 이루며 아름다운 음악을 뿜어내던 악기였다가, 사고 파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점점 값이 치솟는 상품이 된, 대부분은 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소리 낼 일 없이 걸린 전시물이 된 스트라드를 보며 갑자기 인간의 소유욕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트라드는 악기가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소유욕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그 어떤 음악가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치른 수집가도 스트라드의 진정한 주인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스트라드를 보며 박제된 천재를 연상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토비 페이버의 후기에 상당 부분 공감하게 된다. 결국 스트라드는 악기이다. 모든 악기는 연주되면 그만큼 마모되고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상을 두려워해 스트라드를 계속 걸어두기만 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악기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악기를 명기라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소유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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