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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아픔, 불편함, 위화감, 상처, 열등감, 부러움, 질투와 같이 은밀한 감정을 떠올렸다는 사실도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벽을 세우고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런 행동들이 상대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떳떳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게 된다.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나의 환경 혹은 처지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나 혼자 지레 짐작하고 선을 긋고 함부로 판단하는 모습들을 보며, 나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마도 수많은 오해들이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갈등 조차도 피하기 위해 속으로만 품고 있던 감정들. 시간이 흘러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편향적인 시선으로 본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내가 쌓아 올린 벽을 허물게 하는 것도 어떤 시점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어떤 경험을 함께했던 그들이었다.
갈등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에 큰 변화가 오는 건 아니다. 이제와서 갈등을 풀기에는 시간이 꽤 흘렀고 그만큼 관계가 애매해졌음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 마음의 한켠에 답답하고 불편했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더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그려갈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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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p
상처 입은 말들이 따로 또 깥이 살아가는 풍경이, 어쩐지 인간관계의 한 지침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영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일지라도 끝끝내 곁을 지키며 함께 존재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 저마다 다른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 아닐까 하고요.
170p
다시 힘차게 고갯짓하는 강아지를 보며, 그녀는 오늘밤 무재에게 초원을 만나겠다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도 아직 알 수 없는 채로. 차에서 내린 은화의 희끗한 머리 위로 그보다 더 흰 눈이 정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득한 과거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마침내 그녀를 따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