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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을 뜻한다. 역사적인 서술에서 이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近域)과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일본어)의 50음도를 점차로 쳐달라고 해 혀로 핥아보았지만 어쨌든 처음엔 아무거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계속 하고 있으면 어깨는 결리지, 눈은 빨갛게 충혈되지, 눈물을 뚝뚝 떨어지지, 침은 나오지, 종이는 금세 끈적끈적해져요. 그래서 젖어도 점자의 점이 지워지지 않는 종이를 쓰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그림염서라든가, 달력의 표지라든가 말이에요. 그런 종이에 점자를 쳐주면 처음엔 매끌매끌하던 게 조금 있으면 딱딱해져서 구멍이 난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혀를 내밀고 고개를 흔들며) 젖어서 미끈미끈해져요. 언제나 처럼 침이겠지 하고 핥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 사람이 보고, ‘어어 이봐, 피가 나와’ 하는 거예요. 혀끝에서 피가 나오는 거지요 

                                                                          - 디아스포라 기행, 230쪽, 재인용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모어(母語)를 일본어로 사용하고, 모국어(母國語)는 한국어이며, 국적(國籍)은 한국이나 스스로는 ‘조선 반도’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재일조선인’이다. 일본어가 모어(母語)인 탓에 그는 ‘옮긴이’가 필요하다.

예술에 관한 에세이스트라고 소개하고 있긴 하나, 정확히 그가 일본의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고,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어떤 공간에서도 처음엔 타의에 의해서, 다시 자의에 의해서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읅으면서 “플라이 대디 플라이(카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북폴리오)”를 떠올렸다. 재일 조선인(또는 한국인) 작가 자신이 일본 소수민족(조선인을 포함한)이 되어 주류 일본 사회와 동화되지 못한(않은) 채 비상을 꿈꾸는 그 낙천성이 떠올랐다. 디아스포라가 언제나 절망 속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디아스포라 기행”에 언급하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은 절망을 내면화하고, 그 절망의 힘으로, 김훈 식으로 표현하면 ‘온 몸으로 밀고가’면서 이뤄낸 예술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서경식은 역시 ‘온 몸으로 밀’면서 쓴 언어로써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나의 천박한 예술 경험이 저자의 경험치에 너무도 미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함량미달인 나에게조차 ‘디아스포라’는 많은 영감을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끝끝내 의문문 하나를 만들고 말았다.

<국가적, 역사적 맥락에서만 디아스포라가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이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실재하는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말이다. 한국어를 모국어와 모어로 사용하나, 상류층과 그 고급한 이들이 쓰는 언어적 양상과는 사뭇 다르며, 사회보장제도 안에 놓여져 있기는 하나 시혜적 태도 앞에서 언제나 몸을 낮추어 ‘받아먹도록’ 또는 ‘기생한다’는 식의 상황이 그들을 디아스포라가 되도록 할 것이며, 다시 디아스포라를 선택하게 되지 않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상황을 떠나도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는 양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역사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디아스포라이다. 여성의 절대적 권리와 평등을 말해도 우리 사회는 디아스포라이다. 학교에서 ‘평가’의 비서열화, 절대성, 교수자의 피드백만을 얘기해도 디아스포라이다......

그럼에도 디아스포라는 절망을 내면화한 힘으로, 온 몸으로 밀면서 나아간다. 나아가야 하는 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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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황석영은 성장소설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의 자전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자전이 그의 성장기였기에 성장소설이라는 노소설가의 말도 결코 틀리지는 않겠지.

황석영의 삶의 흔적을 드리웠던 곳곳은 내게도 한 삶이 있던 곳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 나라가 좀더 넓었다면 그의 삶의 공간이 내게 겹쳐지지 않았을 텐데, 좁은 이 땅덩어리는 그의 삶과 노동이, 내 찌질한 삶의 공간과도 겹쳐지니 나로서도 그 예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마산 가포 바다의 휑뎅그레한 모습, 고교 시절 괜시리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고는 혼자 쓴 웃음 짓고, 소리쳐보기도 하던 그 치기가 부끄럽게도 떠오른다. 미호천의 물소리를 말하니, 미호천 모래밭으로 과 동기들을 끌고가서 결국 여자 동기 하나를 물에 냅따 집어던지고는 킬킬거리던 유치도, 대학 1학년 무전여행이랍시고 떠난 10여일 간의 여행길과 그 더운 여름 나절의 길들도 어슴프레 기억케 한다. 갖가지 일들로 데모를 하던 때,3일간 경찰서 철창에서 보리밥을 맛나게 먹고 나온 그 날, 청주에서 다락골로 돌아오던 그 호젓한 가로수길은 차라리 낭만적이었다.

그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나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전혀 인과를 추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기억과 그 추억이 자락들이, 성긴 가지의 나무 아래도 적시지 못하는 어줍짢은 비인냥 별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분명 '오늘을 사'는 진지함이 있었던 듯 싶다. 

 
지난 여름 방학, 아내와 아이가 잠들고 나면 자전거를 끌고 나와 호포와 물금역을 돌아 자전거를 탔다. 호포에서 양산천이 낙동강을 끼어드는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어둠 속에서도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면, 흘러가는 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지만, 또 그 뒤에도 연달아 또 흐른다는 것이 너무도 철없다는 생각을 했다. 삶도 그렇게 철없구나 싶다. 그래서 "씨팔"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 길로 자전거를 타면 물금역으로 가는, 기찻길과 함께 달릴 수 있는 둑방길을 가게 된다. 기차는 밤낮없이 떠나기만 하더군. 기차는 돌아오지 않고 언제나 떠난다. 그래서 또 "씨팔"하면서 담배 한 대. 

'개밥바라기'마냥  잊혀졌다가 '추억'으로 떠오르는 삶의 잔영들과 어느 노래가사마냥 '다르게 적'힐 추억들이 그래도 어쩌랴 "시팔" 나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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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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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가 김연수는 이 글을 '논쟁적이다'라고 평을 했다.

분명히 '발칙한 아내'가 불륜과 양다리와 두 집 살림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현재의 도덕관념에서 보면 분명히 천박한(?) 이 이야기가 왜 재밌지? 우선 이 소설은 비현실적인 만큼 판타지 소설마냥 재밌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 문학의 미덕을 보여준다. 김연수의 말처럼 누구나 할 말이 생기는 '논쟁적' 미덕이 있다.

 

이 소설을 읽은 남성은 모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이런 '년'에 대해 성토를 한다고 들었다. 그럴 수 있다 싶다. 대한민국의 남성들 중 지금도 이 시간에도 두 집 살림을 하거나, 바람을 피거나, 어쩌면 벌건 대낮부터 낯선 곳에서 오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남성들은 걸려도 용서 받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여성은? 물론 용서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왜? 대한민국이니까. 그런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두 남자를 당당하게 거느리는 얘기가 어찌 대한민국 남성의 가슴에 열불을 지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여성취향적이거나 여권주의자의 소설은 결단코 아니다.

이 소설의 중심를 '발칙한 인아'가 지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여전히 남성적이다. 축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이 소설의 남성적 장치이다. 여성이 남성의 지위와 논리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면에서만 보면 여성주의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내가 결혼했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 없는 결혼이 무의미하다면, 사랑이 유지되는(있는) 모든 결혼 양식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자식 때문에, 살아온 정 때문에라는 비겁한 말보다는 이혼이 훨씬 아름답다. 동의한다.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라면 당연히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사랑이 결혼의 조건인가? 오로지 사랑만이 결혼의 조건인가는 나는 여전히 의심한다(오해가 없길... 내가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거나 사랑 없는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적으로 오해다). 속물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자본주의는, 아니 그 어떤 시대도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명분으로만이라도 결혼의 전제로 사랑 운운한 것은 최소한 개인을 발견하는 근대에 이르러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결혼'을 말하는 순정 소설이다. 오로지 결혼의 조건을 '사랑'이라 말하는 이 소설이 어찌 순정소설이 아니겠는가? 다소 과격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둥, 비상식적이라는 둥의 얘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가 난 결코 '발칙한 인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을 전제하는 낭만적인 결혼을 말한 것이리라 여긴다.

또 하나 결혼이라는 제도가 갖는 폐쇄성에 대한 얘기도 이 소설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여긴다. 이 폐쇄적 결혼양식이 남성 중심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나 역시 그런 편리 속에 있기에 더욱 잘 안다. 결혼이라는 현재의 문화양식이 지배적 흐름이고 여타의 시도는 모두 '불륜'이므로 이를 어쩌지는 못하겠으나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어떤 방향이어야 할지는 모호하지만, 그냥 문제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니네 마누라가 말이야 어쩌구 하면서 말꼬리 잡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꼬리잡기는 어릴 때나 하는 것이니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성석제는 심사평을 이렇게 썼다. '빠르다, 신선하다, 흥미진진하다' 맞는 말이다. 나는 덧붙이고 싶다. '뒤집힌다.' 속도 뒤집히고 웃다가 뒤집히고 생각도 뒤집힌다. 그러면서도 책을 덮으며 나는 이렇게 박수를 친다. "소설은 소설일 뿐 따라하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 따라하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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