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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 - 경조증과 우울 사이에서, 의사가 직접 겪은 조울증의 세계
경조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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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요즘처럼 이 문제에 대해 골돌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늘 내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사랑해본 적이 없고, 늘 나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찍힌 사진이며 동영상, 내 목소리가 녹음 된 것 등을 보고싶지가 않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마음속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채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보니, 나의 불안정한 마음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아이들도 나처럼 마음 속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떤 것보다 막고 싶은 일이다. 내가 겪은 것을, 낮은 자존감으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아이들이 똑같이 겪게 할수는 없다.


그런 고민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던 중 내 삶을 돌아보게하는 의미있는 책을 만난다. 의사이면서 이름도 생소한 2형 양극성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경조울 작가의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이라는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했다. 의사이면서 조울증을 겪고 있다니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교내 장애인휴게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한 적이 있었고, 그때 나는 조울증을 앓는 선배를 만나게 됐다. 그 선배에게 조울증을 겪을 당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통해 어렴풋이는 어떤 병인지는 알고 있었다. 98학번이었던 그가 20대 초기에 발병을 하고 200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을만큼, 그 병은 그를 오랫동안 뒤흔들었던 것 같다. 경청하며 듣기는 했지만, 그가 겪은 극단적 증상들은 실로 '질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가 글쓰는 것을 좋아하고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는 말도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겠다.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의사가 된 누군가의 조울증에 관한 이야기가 내 손에 들렸던 것이다. 나는 그 조울증, 양극성장애라는 세계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기회를 맞아 호기심에 들뜰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던 초반에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나오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제껏 '조울증'과 '의사'라는 단어로 조합해낸 작가의 이미지는 내게 의심의 여지없이 '남자'였던 것이다. 의사이기에 당연히 남자를 떠올린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책은 내게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책 속에서 아직도 웅크리고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내 마음 속의 어린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의대를 다니던 작가가 우울증이 심각해짐을 느끼고 교내의 상담실을 찾아가면서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는 그가 2형 양극성장애라는 것을 알게된다. 양극성장애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되는 조울의 의학용어인것 같고, 양극성장애는 조증도 우울증만큼 강하게 나타나는게 1형, 조증은 우울증보다 좀 더 약하게 나타나는게 2형이라고 나는 단순하게 이해를 하였다. 작가의 경우도 우울증이 훨씬 길고 자주 나타나기에 조울증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우울증뿐아니라 가끔이지만 조증도 찾아오는, 단순한 우울증과는 다른 질환이라고 한다.

그녀가 우울증이 찾아올때 겪었던 시간들은 내가 대학시절 방황하던 때와 너무도 겹쳐보였다. 타인에게 나의 가치를 찾으려는 모습, 불안정한 이성관계, 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 등이 딱 내 모습이었다. 다만 작가는 2형 양극성 장애를, 나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거대한 터널의 초입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무엇때문에 자신이 2형 양극성장애를 얻게 되었는지에 골몰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시절 부모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녀는 어린시절 공부를 잘했음에도 칭찬받지 못하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보다 학업에 부족한 언니에게 관심과 사랑이 쏠리는 것을 보면서 차별을 느끼며 자라왔다고 한다. 그녀는 책 속에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막상 엄마와의 애착의 문제가 자신의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고 적는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의학적 지식도 전혀 없는 사람이지만, 나도 지금 나라는 사람이 되고보니, 부모와의 관계나 어린시절의 가정환경이 나에게 꽤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대학생때 장애인휴게실에서 만났던 그 선배 또한 대학교 입학 후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이 되었다고 했다. 이 작가가 수많은 페이지를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는 것으로 할애했다는 점도, 작가가 사실은 자신의 문제와 커온 환경이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반증하는게 아닌가 한다.

그녀는 막상 제2 양극성장애의 진단을 받고서도 그 질병을 받아들이는데 오랜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늘 머리가 좋았고 전교 1등을 하던 학생, 공부잘하고 촉망받는 의대생과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며 수없이 자살을 생각하고, 이성간의 관계가 편안하게 유지되지 않는 그녀의 모습 사이의 커다란 간극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녀는 속으로는 불면증과 자살에 대한 생각에 시달리며 죽을 것 같아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 주어진 일상생활도 착오없이 잘 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을 '가면우울증'이라고 표현했는데, 내가 이해하는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듯한 경험은 내게도 너무 익숙하다.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삶 말이다.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것 외에도 그녀가 상담을 받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내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내게도 무언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오래되었다.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럼에도 한번도 그 생각을 실행한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기록한 상담과정, 치료과정은 내게 어떤 의사를 만나서 어떤 대화가 오고갈 수 있는지를 실제로 알 수 있게 해주어서, 내게도 병원에 찾아가볼 용기를 내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의 상처를 드러내어 이야기를 한다는데에는 자신이 없지만, 나의 정신상태에 대한 전문적인 정신감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빠져들어서 책을 읽었다. 그녀의 치유과정은 아직 진행중이다. 상태가 안정적이지만 치료는 계속 받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완치'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이가 인생의 중반에 이르고보니, 누구나 어디 망가진데 한군데 쯤은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걸 알게됐기 때문이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중간에 죽지않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만두지 않고 살아가면 되는 것 같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그녀의 주치의가 했던, 늘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돌보라는 말이었다. 내 마음속의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을 걸고, 어떻게 느끼는지 말을 걸으라는 것이다. 내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바라는 게 그것이다. 내게 좀 괜찮은지 물어봐주었으면. 몸은 괜찮은지, 밥은 잘 먹었는지 물어봐주었으면. 나라도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겠다.

"00아, 오늘은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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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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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긴 문학이라는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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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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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더이상 우리의 육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아주 평범했던 사람들의 경우에 아마도 그것은 남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아닐까 한다. 작가 수 대본집의 첫번째 이야기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에서는 이러한 기억과 우리의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50대이며, 아들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정은 접촉사고로 젊은 20대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어린시절 친구 점순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알고보니 현재는 개명을 해서 유미가 된 점순이는 얼굴과 몸이 젊어지는 시술을 받고 20대로 회춘했던 것이다. 그 시술의 대가는 다름아닌 그녀가 갖고 있던 '기억'이었다. 기억을 잃는 대가로 몸은 젊어지고, 더 많은 기억을 지울 수록 더 많이 젊어진다. 친구의 권유로 시정도 마찬가지로 기억을 지우면서 젊어지는 시술을 받게 되는데, 최근 3년 간의 기억이 사라진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들의 죽음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시정은, 나중에 그 사실을 남편에게 전해듣고 마치 살아있던 아들을 다시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기억이란, 비록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의 기억일지라도, 존재에 대한 마침표를 찍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에서는 기억을 잃은 시정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졌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역할로서의 기억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정의 아들은, 남아있는 이들의 기억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까?



오에 겐자부로의 책 '인생의 친척'에서 그런 대목이 나온다. 자식을 둘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자식을 잃은 고통이 너무나 크지만 자신은 죽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녀가 죽는다면 머릿속에 그녀의 자식들에 대한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유미는 친구에게 시술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너도 잊고 싶은 기억이 있지 않아?"하는 말을 한다. 나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고, 적어도 그 기억이라도 사라졌으면 하는 일도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사실상 망각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잊어야만 살 수 있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20년전 세상을 떠난 나의 동생에 대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첫 수능을 치던 바로 그날, 동생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직 어리던 내게 그 일은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일이 있은 후 10년 정도는 내 기억 속의 그의 존재와 상실간의 충돌로 괴로워했다. 내 기억속에 손에 닿을 듯이 존재하는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자연히 선택하게 된 방법은 '망각'이었다. 나는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함께 죽었다는 것도 점점 망각해갔다. 말하자면 나의 기억 속에 그의 존재가 점점 옅어져 간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에 대한 것들은 너무도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단 한가지만은 내가 죽는 날까지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그의 모습, 그와의 추억, 다툼, 그의 17년의 인생은 누가 기억해줄까. ​




이 책은 다섯편의 대본이 수록된 것이었는데, 책 속의 다른 이야기들도 내게는 잘 와닿는 내용이었다. 다섯편을 다 읽고나니 작가의 성향이 드러나는듯 했고, 무엇보다도 작가가 전해주는 정서를 통해 그가 나와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점이 문학의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경험한 바로 그 시대를 기록하는 것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이 들어있고, 바로 그녀가 나고 자라고, 보고 듣고 경험한 한국이 들어있었다. 매우 익숙한 정서이기에 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독창적이고 새로워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의 한 장면을 이야기로 쓴 것을 보면 그녀는 오히려 잊혀진 우리를 기억해내고 상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를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성형수술을 비롯한 '젊음에 대한 찬양'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호상'과 '수목장'은 고령화되는 사회에서의 병든 부모를 간호하는 문제, 안락사 문제에 대해 다루고, '새순'은 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갈릴리 병원'은 병의 치유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모든 이야기가 잘 읽히고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이야기라서인가 '수목장'이 가장 여운을 남겼다. 사실 유일하게 사랑이야기라서 더 흥미있게 읽는지도 모른다. 간호사로 일하는 현주가 (아마도) 말기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부탁으로 안락사를 시키면서 살인죄로 감옥에 가게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더 예전에 읽었더라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옥에 갈 것을 무릅쓰고 안락사를 도울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년 전, 개그우먼 박지선이 엄마와 같이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후, 가까운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부모가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서평단 신청을 하여 읽게 되었다. 사실 나는 대본집인 줄도 모르고 신청을 했던 것을 책을 받고서야 알았다. 황당함 반, 걱정 반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몇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소설을 잘 읽지 못하고, 특히 단편집은 어려웠던 나인데, 이 책은 짧은 이야기의 묶음이었음에도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용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쉬워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여기, 지금, 한국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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