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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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더이상 우리의 육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아주 평범했던 사람들의 경우에 아마도 그것은 남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아닐까 한다. 작가 수 대본집의 첫번째 이야기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에서는 이러한 기억과 우리의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50대이며, 아들을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정은 접촉사고로 젊은 20대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어린시절 친구 점순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알고보니 현재는 개명을 해서 유미가 된 점순이는 얼굴과 몸이 젊어지는 시술을 받고 20대로 회춘했던 것이다. 그 시술의 대가는 다름아닌 그녀가 갖고 있던 '기억'이었다. 기억을 잃는 대가로 몸은 젊어지고, 더 많은 기억을 지울 수록 더 많이 젊어진다. 친구의 권유로 시정도 마찬가지로 기억을 지우면서 젊어지는 시술을 받게 되는데, 최근 3년 간의 기억이 사라진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들의 죽음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시정은, 나중에 그 사실을 남편에게 전해듣고 마치 살아있던 아들을 다시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기억이란, 비록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의 기억일지라도, 존재에 대한 마침표를 찍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에서는 기억을 잃은 시정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졌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역할로서의 기억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정의 아들은, 남아있는 이들의 기억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까?



오에 겐자부로의 책 '인생의 친척'에서 그런 대목이 나온다. 자식을 둘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자식을 잃은 고통이 너무나 크지만 자신은 죽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녀가 죽는다면 머릿속에 그녀의 자식들에 대한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유미는 친구에게 시술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너도 잊고 싶은 기억이 있지 않아?"하는 말을 한다. 나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고, 적어도 그 기억이라도 사라졌으면 하는 일도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사실상 망각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잊어야만 살 수 있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20년전 세상을 떠난 나의 동생에 대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첫 수능을 치던 바로 그날, 동생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직 어리던 내게 그 일은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일이 있은 후 10년 정도는 내 기억 속의 그의 존재와 상실간의 충돌로 괴로워했다. 내 기억속에 손에 닿을 듯이 존재하는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자연히 선택하게 된 방법은 '망각'이었다. 나는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함께 죽었다는 것도 점점 망각해갔다. 말하자면 나의 기억 속에 그의 존재가 점점 옅어져 간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에 대한 것들은 너무도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단 한가지만은 내가 죽는 날까지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그의 모습, 그와의 추억, 다툼, 그의 17년의 인생은 누가 기억해줄까. ​




이 책은 다섯편의 대본이 수록된 것이었는데, 책 속의 다른 이야기들도 내게는 잘 와닿는 내용이었다. 다섯편을 다 읽고나니 작가의 성향이 드러나는듯 했고, 무엇보다도 작가가 전해주는 정서를 통해 그가 나와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점이 문학의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경험한 바로 그 시대를 기록하는 것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이 들어있고, 바로 그녀가 나고 자라고, 보고 듣고 경험한 한국이 들어있었다. 매우 익숙한 정서이기에 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없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독창적이고 새로워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의 한 장면을 이야기로 쓴 것을 보면 그녀는 오히려 잊혀진 우리를 기억해내고 상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를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성형수술을 비롯한 '젊음에 대한 찬양'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호상'과 '수목장'은 고령화되는 사회에서의 병든 부모를 간호하는 문제, 안락사 문제에 대해 다루고, '새순'은 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갈릴리 병원'은 병의 치유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모든 이야기가 잘 읽히고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이야기라서인가 '수목장'이 가장 여운을 남겼다. 사실 유일하게 사랑이야기라서 더 흥미있게 읽는지도 모른다. 간호사로 일하는 현주가 (아마도) 말기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부탁으로 안락사를 시키면서 살인죄로 감옥에 가게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더 예전에 읽었더라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옥에 갈 것을 무릅쓰고 안락사를 도울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년 전, 개그우먼 박지선이 엄마와 같이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후, 가까운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부모가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서평단 신청을 하여 읽게 되었다. 사실 나는 대본집인 줄도 모르고 신청을 했던 것을 책을 받고서야 알았다. 황당함 반, 걱정 반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몇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소설을 잘 읽지 못하고, 특히 단편집은 어려웠던 나인데, 이 책은 짧은 이야기의 묶음이었음에도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용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쉬워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여기, 지금, 한국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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