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쉽게 선택했다
이은희 지음 / 좋은땅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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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다던가,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고. 행복해보이는 부부조차도 들여다보면 다들 불협화음이 있고, 아주 가끔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으로 지난한 세월을 견뎌가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마음이 편하다고 할까. 난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됐다고 할 수 있는 결혼생활이라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오랫동안 보아온 나의 부모님을 보면, 결혼은 안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게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3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부모세대의 결혼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바로 이은희 작가의 '결혼을 쉽게 선택했다'라는 책이다. 아들의 추천사로 시작하는 이 책은 60년대 베이부머 세대인 작가가 당시 흔히들 그러하듯 25살에 중매로 만난 사람과 몇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곧 그 결혼이 잘못됐음을 깨달은 채로 30여년을 고통받으며 살아간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내었다. 저자를 괴롭게 했던 장본인인 전남편은 결혼 후 한 10년 까진는 매달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다 주기는 했으나,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아내는 집에서 집안일하며 자신에게 밥을 차려줘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자신을 늘 무시했기에 그 짓눌린 중압감을 견디며 살면서 저자는 나중에 온갖 병을 얻어 몸이 쇠약해질 지경이 되게 만든 사람이지만, 사실 그런 남편은 내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나의 아버지도 그러하니까 말이다. 워낙 폭력적인 면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엄마를 심리적으로 압박감에 시달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일과 육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엄마를 밥차려주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불쌍했던 아빠는 힘들게 느껴지면 수시로 일을 그만두고 일을 안하는 적도 많았으며, 그랬기에 엄마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이 초등학교에 갈 무렵부터 무지런히 이일 저일 다니셨던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결혼 후 10년간은 일을 하며 월급을 타오던 저자의 전남편은 IMF 때 직장을 그만둔 뒤로는 오랜동안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저자가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하루 10시간 이상씩 육체노동을 하다가 몸이 점점 망가져가고, 그럼에도 생계 때문에 아파도 병원에도 가지 못하면서 참고 일하다가 건강상태는 더욱 나빠진 것 같다. 60대가 다 되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뒤에 결국 이혼을 하기는 했지만, 쇠약해진 몸으로 더 이상 인생을 즐기는 것도 힘들어진 것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상일은 약자에게 더욱더 가혹해지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33년의 결혼생활 뒤에 이혼을 했다고 해서, 그 후에는 뭔가 통괘한 복수같은 상황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저자의 전남편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날이 올까? 언젠가는 남편들이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신들이 마치 식당에서 그러듯 손님처럼 식탁에 앉아서 당연한듯 받아먹는 매일매일의 저녁이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저자가 힘든 상황에서도 왜 그리 이혼하는 것이 어려웠나를 보면, 시대적으로 이혼에 대해 인식도 안좋고, 자식들에게 해가 갈까봐서 참았다고 한다. 싫은 사람과 헤어지는게 속편하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저자는 이혼후에도 한동안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은 것 같다. 추측컨대 이혼이라는 것이 '결혼생활의 실패'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의 크나큰 실패를 한 것만 같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자책감이 드는게 아닐까 싶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책의 초반에 저자가 첫째를 임신하고 나팔관에 혹이 여러개 발견된 채로 조마조마하게 임신을 이어가는 부분이었다. 임신 초기에 의사들은 수술을 해야하니 아기를 포기할 것을 권유했고, 운 좋게 만난 다른 의사는 임신을 이어가며 임신 6개월에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도 했지만, 저자는 임신 6개월이 되어도 수술을 받지 않고 임신을 이어간다. 그러다 결국 임신 9개월에 배에 통증이 생겨서 병원에서 결국 나팔관 수술을 받았다는데, 당시 아기를 출산해도 됐을텐데 날짜가 다 차지 않아서인지 수술부위를 꽤매고 임신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부분에서 참으로 놀랐다. 결국 죽을 고비를 넘기고 10개월만에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게 됐다고 하는데, 어찌보면 미련하다 싶을 무모함이지만, 아기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렇게보면 작가의 삶은 '견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위태로운 임신을 견디고,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견뎌냈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를 지탱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었나 싶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몇십년의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자문해보지만, 사실 나의 삶도 하루하루가 견딤이다. 저자의 삶과 비할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삶이란 것은 오랜 견딤 끝의 작은 행복, 그것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그 행복이 좀 더 커지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련다. 저자도 힘든 순간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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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유쾌한 철학 이야기
김헌 지음 / 북루덴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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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철학'이라고 하면 나와는 멀고, 잘 모르겠지만 뭔가 어려운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뭔가 중요한 것 같기는 한 이 철학을 학창시절에는 철학이 아닌 도덕이라던가 윤리라던가 하는 과목에서 배웠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있고, 그 과목에서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토론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현재 삶에 위치시키거나 할 기회는 당연히 없었다. 그저 '누가 언제 이런 말을 했고, 또 누구는 이런 말을 했고, 시험에 나오니 외외라.'라며 우리의 머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두통의 상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철학이라는 것을 가깝게 느끼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을 즐길 사람이 적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철학과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적 소양을 높여보고자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만 하고 그냥 반납했던 기억이 쌓이면서, 내게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그리고 몇몇 선택받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름 삶의 굴곡을 경험하고, 엄마가 되고, 불혹이 지나고 하다보니, 이제 삶에서는 떼쓰는 아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고 느껴지는 내게 그 어려웠던 '철학'을 다시 들여다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지금의 내가 철학으로 쉽게 인도해줄 길잡이가 될 책을 만난 것도 운이라면 운이라 하겠다.

그렇게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이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이다. 서울대 교수님의 철학책이라고 하면 느낄 사람들의 위화감을 고려하셨는지 책은 처음부터 에필로그 전까지 '~다'체가 아닌 '~입니다'체로, 마치 대학에 막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얼떨결에 철학교양수업을 듣게된 신입생에게 설명하듯 쉬운 언어로 복잡하고 어려울 듯한 철학에 대해서 풀어냈다. 책에서 무엇보다 나를 이끌었고,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해주었던 것은 서문이었다. 이 책의 서문은 '인문학'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한다. '사람 인'과 '글월 문'의 조합으로 된 것이 '인문'이라는 단어인데, '문'이 중국 갑골문에서는 '사람에게 문신을 새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인문'은 '사람의 무늬'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뜻을 좀 더 확장해보면, 인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긴 자취라고도 볼 수 있고, 그렇기에 사람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이어진다고 한다.

저자가 이렇게 길게 인문학의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인문학, 즉 사람에 관한 학문 안에 소위 문학, 역사, 철학의 세 분야가 있기에, 즉 인문학에 철학이 속해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고, 문학은 인간됨에 초점을 두어 일어났을 법한, 일어날법한 일을 인간의 상상력으로 채운 창작물이다. 철학은 어떠한가? 철학은 인간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할지, 인간의 행위의 당위성과 도덕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이제껏 따로 따로 생각해왔던 학문의 분야를 인문학으로 묶고, 그 안에서의 철학을 생각하니, 철학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우리가 왜 철학에 대해서 알고, 고민해보아야하는지를 알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앞으로 책에서 전개될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바로 저자의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총 4부로 되어있는 본론에서는 말하자면 저자가 쉽게 풀어낸 그리스 철학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퓌타고라스'로부터 시작해서 시대순으로 주요하게 다루어져야할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들어보지 못한 철학자들이다. 최근의 연구 방향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연구되지 않았지만 최근에야 주목받는 철학자들도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책에는 많은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고, 각각의 철학자마다의 사상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고,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해할만한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누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를 기억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왜 철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며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고자 했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철학자들이 스스로의 만족이나 지적인 고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철학이 출발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라는 제목도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게 아닌가 한다. 제목에 언급된 소크라테스나, 그의 제자로 알려진 플라톤도 마찬가지로 당시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전쟁에도 참여하면서, 한 도시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대화로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그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했다는 점은, 몇 천 년 전에 살았던 철학자들이 참으로 현대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책에서 또한 쉽게 와닿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질 그리스어로된 사람이름이나 단어의 그리스어 뜻을 풀이해 준 것이다. 예를들어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소'는 '몸 성히 안전한'이라는 뜻이고 '크라테스'는 '튼튼하고 힘이 세다'라는 뜻으로, 두 단어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는 신체가 돌과 쇠처럼 단단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어 뜻을 풀어서 설명해주니 쉽게 다가오기도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이름을 지었는지가 이해되니 재밌게 느껴졌다.

책을 통해서 이해한 당시의 철학자의 중요한 역할은 교육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이 깨달은 바를 설파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철학학교라고도 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체계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교육은 사상이나 책에서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고, 왕이나 왕자를 교육하고 자문역할을 해서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세상을 직접적으로 이롭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철학자들이 그렇게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과 더불어서 당시에도 책을 쓰고, 도서관을 설립해서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는 대목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학생들의 마음, 정신에는 선생님이 가르쳐야할 모든 것이 이미 다 들어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선생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잠재력을 길러주는 존재여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학생을 가능성의 존재로 보는 시각은 현대에 와서 더욱더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떼'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학교에 다닐때까지만해도 기존의 학자들이 이루어놓은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교육이었다. 학생들의 머리는 백지이고, 학자들은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아는 것을 받아들여야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고 있다. 우리가 어렵게 외우고 시험에서 테스트 받던 그 지식은, 이제 더이상 어렵게 채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터넷에 몇자 두드리면 정보가 다 나오고, 심지어 지금은 '쳇 GTP'를 비롯한 인공지능이 우리를 대신에 지식을 조합해서 그럴싸한 글을 써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렵게 영어 단어와 문법을 배워서 해석할 필요도 없어졌다. 아직 완벽하진 않아도 구글번역기가 우리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을 해준다. 인간에게 있어서 점점 지식을 채워넣는 능력은 갈수록 위협받고 있다. 앞으로는 단순한 지식을 통한 직업은 빠르게 사라져갈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을 해야할 것인가, 어떻게 미래를 대비해야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미래에 인공지능에 뒤지지 않고 '인간'만이 가진 능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는 방법을 나는 철학이 제시해주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누가, 언제, 무엇을'했는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왜'라고 물어야할 테니까 말이다. '왜'라는 것을 고민하고 '가치'를 고민하고 '당위'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사명이니까 말이다.

그 '왜'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아는 모양이다. 말이 좀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은 끊임 없이 질문을 하고, 바로 '왜'냐고 묻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엄마이기에 당연히 우리의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앞서서 양적인 지식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고 적긴 했지만, 지식을 전혀 습득하지 않는 교육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지식의 습득 과정에서도 뇌는 발달할테니까 말이다. 다만 앞으로 아이들을 대할때, 그들이 궁금해 하는 '왜'라는 질문에 나도 좀 더 진지해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AI에 비해 좀 더 '인간적'일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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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간 소크라테스 - 철학자의 삶에서 배우는 유쾌한 철학 이야기
김헌 지음 / 북루덴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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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인간을 위협하는 시대에 읽어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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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엽서
안느 브레스트 지음, 이수진 옮김 / 사유와공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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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덮고 이 책이 소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졌다. 입체적인 구성과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틱한 이 이야기를 나는 작가가 고심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철저히 조사한 끝에 조직해낸 소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실제로 작가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묘한 끌림의 표지의 여인은 책에도 수없이 등장한, 만나는 이들 모두 재능을 의심치 않았고, 나중에 뛰어난 작가가 될거라고 믿었으나 20대 초반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노에미 라비노비치'라는 사실도 책을 다 읽고 알게 되었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성해낸 이야기라고 해도, 책속의 이야기는 유대인 가족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로 충분히 나를 흔들어놓을 법 했다. 하지만, 정말 그 '노에미'가, '미리얌'이 실재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책속의 낱낱의 일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이, 책속의 지명, 등장인물들, 언급되었던 책, 연도 등 모든 것이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이 나의 폐부를 찌른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러하다. 2003년의 어느 날, 책의 화자인 '안'의 엄마 '렐리아'는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엽서를 받는다. 오래 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엽서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들은 렐리아의 조부모와 삼촌, 이모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에브라임, 엠마, 노에미, 자크'

발신인이 없이 이미 세상을 떠난 렐리아의 엄마이자 에브라임과 엠마의 딸이며 가족중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미리얌 앞으로 온 엽서는 가족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지만,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길이 없기에 그뒤로도 한동안 그 엽서는 잊힌다.

십년의 시간이 흐르고, 책의 화자이자 저자인 '안'은 임신을 하면서 엄마인 렐리아에게 그동안 궁금했으나 듣지 못했던 선대를 살아간 그녀의 가족의 이야기에 대해 묻는다. 책은 그렇게 엄마가 딸에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그 엽서를 보낸 것인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으로 구성된 이 책은 뛰어난 스릴러처럼 한번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 소설이 다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엇갈린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된단다."

1부의 첫문장을 보면, 이 책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것 말고 많은 풍부한 것에 대해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는 러시아에서 시작된다. 라비노비치 가문은 러시아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다. 책의 초반을 읽다보면 '유대인' 가정이 어떠했는지, 어떤 문화를 갖고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몇천 년 전 유대민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의 이야기를 여전히 유월절 저녁에 읊고 있는 유대인들. 그들의 아픈 역사는 '어느 한때 그랬던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0세기에 들어서도 유대인 혐오 감정은 계속되고, 혐오로 인한 비극은 세대를 거쳐서 조부모 대에서도, 부모 대에서도, 자식들에게서도 일어나게 된다. 책의 초반에 놀랐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홀로코스트가 나치에 의해 촉발된 그 시대만의 정치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나였다. 반유대주의는 비단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있었던 말하자면 흔한 정서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것에 대한 의문은 책을 읽고도 풀리지 않았기에 관련책을 좀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튼 엽서에 적힌 사람 중 에브라임의 부모는 유대인에게 점점 험학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신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갈거라며 자식들에게도 러시아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조언한다. 당시는 1920년대 무렵이다. 밝힌대로 에브라임의 부모는 러시아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자식들은 뿔뿔히 흩어지지만 부모의 말대로 안전한 나라를 택하지 않았다. 에브라임과 엠마 부부는 팔레스타인에 머물렀었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생활이 아니기에 에브라임의 동생이 있던 프랑스로 이주한다. '미리얌, 노에미, 자크' 세명의 아이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에브라임, 엠마 부부는 그렇게 프랑스에서 2차 세계대전을 맞게되고,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다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가족중에 유일하게 큰딸인 미리얌은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게 되고 비극을 피할 수 있게 되는데, 그녀가 차 트렁크에 숨어서 검문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주하는 상황을 보면, 여기서도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게되는지는 순전히 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미리얌은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딸인 렐리아를 낳고, 렐리아가 다시 안을 낳으면서, 렐리아가 엄마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조사하고, 그것을 안과 공유하며 안이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만으로도 손을 놓을 수 없게 하지만, 책의 감동과 흡입력은 내용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책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하는 구성, 앞서 말했듯이 인간사의 여러면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통찰, 번역문이지만,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의 아름다움 등이 그 어떤 책보다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여느 훌륭한 소설이라면 모두 갖고 있듯, 바로 그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다. 말하자면, 나치에 의해 희생된 가족이야기라는 특수성과, 가족사 혹은 인간사라는 보평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작가는 특수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무엇보다 아름답게 이끌어낸다. 책에서 내게 가장 와닿은 부분은 화자 '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인 '미리얌'과 '빈센트'의 엇나간 사랑이야기이다. 미리얌에게 결혼은, 결국 그것이, 그리고 남편의 가족이 그녀를 죽음의 위협속에서 구해내긴 했지만, 아름답고도 충동적인 남자에게 이끌려서 어떨결에 하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를 살리는데에는 적극적이었던 빈센트는, 막상 위험이 가라앉자 마음이 더 없이 멀어진다.

"위험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의 유일한 배경이었다. 빈센트는 그걸 좋아했다. 그에겐 그게 필요했다. 반대로 미리얌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농촌에서 맞이하게 된 단순하고 조용한 새 일상이 좋았다." (432쪽)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미리얌은, 살아있는 그를 볼 때마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보듯 바라보아야 했다." (432쪽)

"웃으며 즐거운 저녁을 보낸 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마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침대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함께 매일매일을 보내도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433쬭)

"그날 밤, 미리얌은 자신이 쓸모없는 육신을 짊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얌은 그녀에게 아무런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수수께끼의 남자를 세상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 아름답고 슬픈 남자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때론 아이처럼 순진하지만 번득이는 눈을 가진 남편이었다. 서로를 이어주는 반지 하나 만큼의 가냘프고 연약한 친밀함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그는 하루 종일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삶과 죽음을 맹세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었다."(435쪽)

이런 사랑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미리얌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빈센트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자이자 손녀인 '안'은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할머니인 미리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빈센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할머니를 통해 파악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만난적도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에 대한 부분은 그를 똑 닮았다고 여겨지는 작가의 어머니를 통해서 추론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도 책에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대부분이 그녀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수많은 질문과 빈칸은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뿐 아니라 책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관청의 공적인 기록, 날짜 같은 것에서도 도움을 받았지만, 살아간 집에 남긴 흔적, 사진, 살아남은 이웃들, 지인들의 이야기가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던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이 평생 겪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 그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교집합이 다른 이의 이야기의 퍼즐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이 들어서 상투적이 되어버린 그 속담처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속에서 또하나의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자식에게 조상에 대해서 잘 알려주지 않으려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저자의 가족사에서와는 물론 다른 이유때문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나의 부모님 또한 내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거의 이야기해주지 않으신다. 분명히 그분들 세대는 일제시대며, 한국전쟁을 거쳐오셨을텐데,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과거는 그들의 머릿속에만 있다. 책속에서 화자인 '안'은 끊임없이 엄마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엄마의 고통을 들추어낸다. 화자의 엄마가 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려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고통과 더불어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참혹한 일의 피해자였던 것이 수치스러워할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수치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나의 부모님도 과거를 부끄러워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엮어 내야한다. 끊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연결시켜야한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에서 교집합을 찾아내어 비어있는 퍼즐을 채워야한다. 최근의 '파친고'의 이민진과 같은 한국 혹은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퍼즐을 맞추려는 노력이 보여서 좋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위해 대단한 작가여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들은 것,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채워나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는 어떤 가족을 살해하고, 그들의 삶을 말살했다. 그것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구성해내는 것만큼 아름답고 강력한 복수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치는 유대인의 존재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수많은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삶 자체로서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책이 된 것이다. 듣는 것 만으로도 수많은 이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나치', 그에 반해 이 작가의 책은 읽음으로해서 그러한 악은 더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깨닫고 느끼고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책이 주는 무한한 감동이다. 책을 읽고, 그것이 불러오는 마음의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 것이다. 악에 대항하는 것은 또다른 악이 아니라, 그 정 반대의 것임을, 예술로서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가치임을 하나의 고귀한 문학작품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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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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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공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치 세계는 인간의 무대이며, 지구의 거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최근에 아주 오랜만에 자연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책을 만나게 되어 여기 소개해본다. 자연주의자 베리 로페즈의 사후에 그의 에세이를 엮어 만든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라는 책이다.

베리 로페즈는 1945년에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자연을 탐구하면서 기록한 것들이 책이 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고, 1986년에는 << 북극을 꿈꾸다 >>라는 책으로 미국도서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책은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자연에 관한 책은 내게는 좀 생소하다. 평소 자연이라고 하면 내게는 우선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탐험을 하다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은 이 책에도 많이 나와 있다. 남극에 가고, 밀림 속의 오지에 가고,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야영을 하며 야생동물과 조우하기도 하는 작가는, 그 순간이 위험하다는 것을 작가도 알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적었다. 처음에는 작가가 왜 그리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이 살지 않는, 머나먼 오지를 탐험하고자 하는지 의아했다. 책을 읽다보니 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넓게는 지구를 향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인간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여기에 살아 숨쉬는 것, 즉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 주지하듯이 말이다.

내게 자연 깊숙히 빠져들어본 경험으로 생각나는 것은 수년전 스쿠버다이빙을 해본 것이다. 바닷속에 들어가보고 싶어서 스쿠버다이빙 초급이라고 할 수 있는 오픈워터 자격증을 땄다. 그뒤로 다시 바다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자격증을 따면서 몇 번, 전에 가본적 없는 비교적 깊은 바다에 들어가보게 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나의 생명유지장치, 즉 산소통의 무게감이다. 산소통이 짓누르는 무게는, 그 짊어지기도 힘들고, 내가 잘 알지못하는 기구에 의지해 깊은 물속에 들어가야한다는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막상 물속에 들어갔을 때는, 나의 숨소리가 나의 감각을 지배하고,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소리가 둔탁해진 바닷 속에서는 나와 바다가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멀리 빛나는 햇빛만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줄 뿐이었다.

내가 바닷속에서 느꼈던 것을 떠올리며, 아마도 베리 로페즈가 자연속에서 이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퓨마나 늑대와 같은 동물들이 나오는 정글에서 헤매고 싶지도,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남극에서 야영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을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단지 호기심이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된다. 그런 미지의 세계 이외에도, 그는 미국에서 원주민이 학살된 장소라던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이 인간의 잔혹함이 행해지던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또한 남극과 같이 인간의 삶이 존재하기 불가능한 곳에서도 그의 시선은 온난화와 기후변화를 향한다. 그는 자연을 탐구하고 탐험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동물과 자연과 함께 조화롭게 삶을 지속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몰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예술가'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 예술가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른 세상을 창조해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은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그의 관점으로 예술가는 그들만의 관점으로 세상과 우리를 매개해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해석을 통해서 자연과 세계의 진실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시 계획을 할 때, 자연에 변화를 가할 때, 그는 예술가들의 시선을 참고하고 그들과 소통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의 글을 읽다가 예전에 적어놓은 글을 읽어보았다. 한창 예술과 사진에 심취해있을 때였고, 나는 세상이 '예술적'이길 바란다고 적었다. '예술적'인 세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표현이 자유로운 세상, 그리고 대립된 의견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베리 로페즈의 생각도 그것과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예술가 이외에도 그는 탐험을 나설때 다양한 학자들과 함께한다. 사실 그의 탐험 중 대부분은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여정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예술가도, 학자들도 세상과 인간의 매개자라는 점이다. 예술가를 통해서, 그리고 학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된다. 베리 로페즈 자신은 어떠한가? 그는 새로운 자연을 경험하고 글로 남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매개자를 중요시여기는 것을 보면, 그가 왜 작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지구 깊숙히 탐구하는 모습은 그의 깊은 트라우마와 연결된 거 같아보인다. 그는 책의 초반에는 그의 어린시절에 겪은 고통에 대해서 언급한 글이 몇 편있었다. 그가 7살 무렵이던 때부터 엄마의 지인이며 의사로 알려진 사람에게 4년이 넘도록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고,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이 일이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임에도 그는 잘 성장하여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글을 보면 어린 날의 고통은 평생 그를 뒤흔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추측해볼 뿐이다. 그가 자신의 깊은 내면의 깊은 곳에, 어둠과 고통 뿐인 그 곳에 닿아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깊은 고통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타인의 고통에 가깝게 닿으려고 했던 그의 삶과 기록은 이제껏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

책속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그가 세계 80여국이상, 그리고 수많은 장소를 여행했음에도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오리건주 픽록 지역에 있는 숲속의 자신의 집이라고 한 점이다. 그는 오랜시간을 매킨지강과 그것을 둘러싼 숲 속에서 보내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부분을 읽고 나는 나에게 묻게되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내가 평생을 두고 가까워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게도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나를 기다려줄 그곳, 나의 부족한 인간성을 품어줄 그곳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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