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말들 - 우리의 고통이 언어가 될 때
조소연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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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각자 개개인마다 서로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쓰기도 하고, 읽은 것을 기록해두기위해 쓰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이 나의 창작물이라는 점도 좋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가 읽고, 읽은 이가 공감을 하고, 그와 어떤 점에서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글쓰기가 몰입의 시간이라는 점인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되기도 하고, 글에 파뭍혀 나를 잊기도 한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경험이다.



글쓰기는 책읽기와 쉽게 연결된다. 순수한 창작이 어렵기에 책을 통해 글감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특히 지난한 육아의 시간동안 글쓰기가 나를 살렸다고 말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오늘은 살기 위해 글을 쓴 또 한명의 작가의 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바로 조소연의 '태어나는 말들'이다.



제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사실 11회 브런치북 대상 발표할 무렵이 내가 막 브런치를 시작할 때라서 당선작들을 관심있게 살펴보았었다. 이 작가의 글도 초반 몇편을 읽어보기도 했다. 끝까지 읽지 않았던 것은 우선 난 책으로 뭔가 '완결'되어 엮어진 글을 읽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는 뭔가 좀 샘이 났던 것 같다. 나도 나의 이야기를 써서 내년 브런치북 공모를 할때 응모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며칠을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내 안의 이야기는 아직 글이 될만큼 영글지 못한 모양이다.



여튼 이 책은 작가가 어머니의 자살을 겪고 그 폭력적인 일을 이해해나가는 과정 속의 생각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충격적인 소재인만큼이나 작가의 글 또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슬퍼런' 느낌인데, 작가는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왜 써야할까, 자문자답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쓰고 싶다는 것 외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고싶다'는 것만큼 강한 동기도 없어보인다. 그것이 작가가 책에서 말한 '자유'아니겠는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은 작가의 관점이다. 독자로서 나는 이 글을 왜 읽어야할까. 이 책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만 다루었다면 굳이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한국사회의 억눌린 여성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발견한다. 비인권적인 행위의 은폐를 강요받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너무도 많이 일어났던 일일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꼭 여성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자에 대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그러한 고통의 연결고리는 어머니에게서 제주의 4.3사건의 희생자에게로 향한다. (억눌린 여성성에 대한 고찰은 좀 더 깊이 끌고나가도 좋을 것 같다. 우리사회는 어떤 것을 은폐하는 것에 대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



사실 제주에서의 이야기가 담긴 세번째 챕터는 묘했다. 앞의 두 챕터는 마치 굿을 하듯이 날이 서있고, 펜이 아닌 칼로 쓴듯, 날카롭고 빠른 호흡의 글들이었다면 세번째 챕터는 꿈을 꾸듯 몽롱하고 부유하듯 느릿느릿하다.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죽고나서 제주에서 다시 환생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비유적이지만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좀 두서없이 적었는데, 사실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날이 서있고 흘러넘치는 비유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 내가 써야할 글처럼,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전에 귀가 트이는 영어에서 counterpart라는 단어를 배웠다. 다른 장소나 상황에서 동급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날 기사에서는 업무적 번아웃에 대응하여 육아에서의 번아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counterpart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니지만 수능을 보던날 교통사고로 동생을 떠나보냈고, 작가는 어머니와 연인을 잃었지만, 나는 비슷한 시기에 동생과 할머니를 잃으므로 해서 강제적으로 나의 유년과 작별해야했다. 출판일을 하며 영화속에서 도피처를 찾았듯이 나도 마찬가지다. 언어공부속에 파묻히고 또한 영화는 나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작가가 새로운 터전을 잡은 제주에서 나는 2년 4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강제로 나의 유년이 끝나고 어른이 되기를 요구받았지만 나는 서른이 되기까지도 사회적으로 어른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할 무렵 그 사회적 관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택한 곳이 제주도였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한다. 나의 이야기는 읽힐만한 글인가?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싶은가?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혼자 제주에 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찾아서, 자유를 찾아서.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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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지적인 산책 -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에 관하여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라이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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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는 얼마나 다양한 얼굴이 있을까? 시골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서울에서 오래 살았고, 시내를 나가면 갈때나 올때 중 한번은 서너시간씩 걸어서 돌아올만큼 나름 걷기와 산책을 좋아하는 나이다. 그런데 그렇게 산책을 할때마다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었는지는 의문이다. 늘 걷던 길로 걷고 보던 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토록 지적인 산책'이라는 책을 받아들었을때, 그리고 이 책이 열한번의 산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책이라고 들었을 때, 산책이 어떻게 책으로 엮어질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도시를 발견하는 정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나도 보는 방법, 경험하는 방법을 바꾼다면 늘 똑같다고 느껴지는 풍경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지은이는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인데 베스트셀러 '개의 사생활'의 저자라고 한다. 컬럼비아대학교 바너드 칼리지에서 심리학, 동물 행동, 개의 인지능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앞서 밝혔듯이 열한번의 산책을 통해 쓰여졌다. 각각의 산책마다 저자는 매번 다른 사람과 혹은 반려견과 산책을 했다. 당시 19개월인 그녀의 아들과 했던 첫번째 산책과 그녀의 개와 했던 마지막 산책을 제외하면 지질학자나 곤충박사, 혹은 야생동물 연구가 등 모두 어떤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이루어졌다. 19개월 아기와 반려견 또한 자신만의 관점에서 산책을 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전문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산책은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대도시에서 진행이 되었다. 대부분은 뉴욕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 책속에서 어느 도시인지가 중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모두 소위 자연속에서의 산책이 아닌 도시산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저자가 살고 있는 뉴욕에서의 산책은 그녀가 모르는 곳이 아닌 일상적으로 거닐던 곳의 산책이었다. 즉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익숙한 곳에서의 새로운 발견을 하기위한 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첫번째 산책은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19개월 아들과의 산책이다. 이또래의 아이와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린아이들과 걷는 것은 몇걸음 가다가 멈추고 이리저리 관찰하고 또 몇걸음 가다가 관찰하기의 반복이다. 아이들에게 A에서 B로의 이동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대부분의 것 들이 새로우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만져보고 느껴보려고 한다. 아이와 걷다보면 나도 아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두번째 산책인 지질학자 호렌슈타인과의 걷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뉴욕에서 그렇게 여러가지의 암석을 발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어느 박물관 외벽에서 예순가지도 넘는 암석을 발견해낸다. 이를테면 '미주리주 출신의 붉은 화강암과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화강암이 나란히 있고 그 옆에는 사우전드아일랜드에서 온 암석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박물관 안에서 4억살이나 먹은 독일 암석을 발견할 수 있다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석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된다. 그리고 암석에서 고대 생물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서의 새로운 시각은, 건물같은 사람이 지은 구조물들은 보통 '인공적'이라고 생각하는게 당연한데, 건물을 이루고 있는 암석이나 나무같은 자재들은 사실 모두 자연에서 왔기에 건물들 또한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번째 산책은 폴 쇼라고 하는 타이포그라퍼와의 산책이다. 그는 '글자디자인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글꼴을 창조하기도 하고 연구하고 그에대해 글을 쓰며 파슨스디자인학교에서 20년넘게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 산책 속에서 수많은 글자들, 레터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을까? 도시에는 간판, 광고문구, 안내표지판 등 눈을 돌리는 모든 곳에 글자가 넘쳐난다. 그런데 그 레터링 디자인을 살펴보면 그것이 어느시대에 제작된 것인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느 곳은 레터링이 여러겹 덧입혀진 곳도 있었다. 그것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간판을 보며 아름다운 폰트디자인과 그렇지 않은 디자인을 찾아볼 수 도 있고, 글자마다의 느낌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쇼의 관점에서 &는 임산부같고, R은 다리가 길고, S는 허리선이 높아보인다고 한다. S는 약간 우울해보이고, 또 다른 S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다고 한다. 어떤 글자를 보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궁금해지는데, 글자를 보고 그렇게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폴 쇼가 얼마나 글자에 빠져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번째 산책인 일러스트레이터 마이라 칼만과의 걷기도 재밌다. 보통 산책은 A부터 B까지의 여정이다. 그런데 칼만은 가는 동안에 들어가볼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들어가보고, 눈이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곳에서는 한참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그녀와의 산책은 A부터 B까지 가기는 하지만 C부터 Z까지 모든 곳을 탐색하는 산책이 된다고 한다. 칼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새로운 곳에 가면 만나는 사람에게 대뜸 말을 거는 것을 잘 하신다. 그러므로써 새로운 정보를 알아오시기도 하고, 기다려야하는 따분한 시간을 때울 친구를 사귀시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칼만은 교회라던가, 노인복지 시설같이 대중에게 열려있는 모든 공간에 자유자재로 들어가보았다. 대부분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공간에는 선뜻 들어가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굳이 그녀를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곳이 아닌 그러한 장소들에 가서 누군가와 시선을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고 나오므로써 그녀는 산책길에 새로운 방점하나를 찍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처음 인사동에서 갤러리에 다니게 된 계기가 생각이 났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고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싶어서 사진학원에 다니던 때였다. 그때 선생님중 한분이 학생들을 데리고 인사동 갤러리에 한곳 한곳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는 어떤 작품들이 주로 전시가 되는지 등을 설명해주셨다. 그 이전까지는 그런 갤러리가 있다는 것도 잘 몰랐고,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도 몰랐었다. 알고보니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들은 모두 일반인들에게 '오픈'되어 있었던 것이다. 닫히지 않은 곳인 이상 들어가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런 계기 이후로 나는 매주 인사동에 다니면서 새로 오픈된 전시를 관람하면서 산책하는 새로운 방법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이 산책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시선에 대해서 알려주는데,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야생동물 연구가 존 해디디언과이 산책이다. 챕터 제목을 보고 도시에 과연 야생동물이 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둘은 산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은행나무에 다람쥐 둥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도시의 밤에 잘 발견되는 동물이 너구리라고 한다. 물론 도시에 쥐들도 많다. 그리고 집참새, 찌르레기, 비둘기 같은 새들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이 챕터를 보고 놀라웠던 점은, 동물들이 의외로 도시의 환경에서 잘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시끄러운 소음때문인지, 야생에서보다 소리를 덜 내게 되었고, 낮에 활동하던 동물이 사람들을 피해서 밤에 활동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장 놀라웠던 것이 '절벽생태학'이었다. 내게는 의외였던 사실이, 자연 절벽이 생명이 꽃피우기 좋은 곳이라는 점이었다. 표면에 이끼가 서식하고, 돌 틈에는 작은 식물들이 살고, 곳곳에 그것을 먹이로 삼는 동물들도 살게된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도시의 고층건물이 자연절벽과 생태학적으로 유사성을 띈다는 것이다. 고층건물에도 자연의 절벽에서처럼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독수리같은 새들이 성당의 종탑같은데 둥지를 튼다고 한다. 코요테도 절벽지역에서 식량을 찾고 번식한다고 한다.



나는 이제껏 도시란 사람이 만든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으로 사람이외의 생명이 살아가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라고, 곤충이나 동물을 끊임없이 배척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인간을 따라 도시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동물들이 상당하고, 새롭게 도시에 살기 시작한 동물이 있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도시의 삶에 맞게 생활습관을 변화시키면서 적응해간다는 것을 알게됐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보니 서울에서 살때 도심 한복판의 재래시장에서 족제비가 출몰한다는 TV방송을 본 일이 있었다. 미리 설치된 카메라에 잡힌 족제비들은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각 몰래 기어들어가 음식을 훔쳐서 달아나곤 했다. 그 방송을 본 뒤로 시장의 가게가 문을 닫은 늦은 밤 유심히 관찰해보니 작은 동물들이 내려진 천막 아래로 분주히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전같았으면 시장에 동물들이 돌아다닐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보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니 전엔 안보이던 것이 보였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아는 만큼 더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인 알렌 고든과 함께 산책을 할때는 소리에 집중해서 산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저자의 반려견 피니건과 산책을 할때는 냄새에 집중하는 법을, 음향엔지니어 스콧 레러와 함께 산책할때는 소리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 책을 다 읽고나서는 우리가 매일 오가는 일상속의 걷기, 산책이 얼마나 다채로워질 수 있는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책에서는 비록 열한가지 산책이었지만, 그것은 수백가지 수천가지로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사진에 집중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대학교때 부터 시작한 사진을 오랜동안 함께 했다. 사진을 찍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산책'이다. 그러나 그 산책이 단지 A지점에서 B지점을 잇는 산책이 된다면 좋은 사진을 찍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천천히 걷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어느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면 오랜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바람과, 햇빛, 지나가는 사람들,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에 집중해보아야 한다. 지나가듯 걸어가며 사진을 찍으면 찍히는 사람이 열에 아홉은 기분나빠한다. 그러나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 같은 공기로 호흡하고 분위기를 공유하고나면 사진기를 들어도 거부감이 덜하다. 무엇을 찍으려느냐고, 나 좀 찍어달라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책속에서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찍으며 산책하는 것도 도시를 새롭게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여럿이서 같은 장소를 촬영하고 결과물을 확인한다면 개개인의 사람들이 서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가 극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초반부터 한가지 의문을 가지게 됐다. 이 책속의 열한가지 산책이 모두 좋고, 새로운 도시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겠다. 그러나 왜 그래야할까? 왜 굳이 더 시간을 들여서 더 신경을 곤두세워서 익숙한 곳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야할까?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답해주지 않았지만 내가 자문자답해본다. 아마도 그것이, 일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예술적인 시선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해지기 위함이라고도 생각한다. 예술가가 될 수 없다면, 삶속에서 예술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인생은 허무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소개한 열한가지 방법은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열한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방법 한가지를 추가해보는 것은 어떨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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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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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주는 책도 좋지만 많은 질문을 하게 하는 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게시물 삭제자입니다'를 읽고 질문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흥미로운 소설이라 이곳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가 사용하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유튜브와 같은 곳에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영상이 올라올 것이다. 사실상 영상을 보는 것 뿐아니라 올리는 것도 '아무나'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영상이 올라올 것으로 생각된다. 개중에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잔인해서 공개됐을때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영상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영상들을 일일히 확인해서 검열하고 삭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껏 그들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네덜란드 작가 하나 베르부츠의 소설 '우리가 본 것'은 그렇게 유튜브와 같은 곳에 올라오는 유해게시물을 선별하고 삭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도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는 대략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막상 그러한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을 쓸 수 있을지가 궁금한 점이었다. '유해게시물 삭제자'라는 소제를 너무 부각시킨다면 소설이 다소 흥미를 끌 수는 있으나 입체감은 떨어질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점을 고려했을 때 이 소설이 뛰어난 점이 이 소설은 다 읽었을 때 내게 유해게시물 삭제자라는 소제보다는 사랑이야기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왜 작가는 '유해게시물 삭제자'라는 소재를 가지고 사랑이야기로 풀어냈을까.



소설을 들여다보면 기본적인 구성은 인터뷰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인 케일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유튜브 같은 곳에서 유해게시물 관리를 위해 하청을 준 헥사라는 업체에 고용되어 일을 했었다. 소설 첫부분에서는 맥락없이 대화 중간에 툭 던져져서 맥락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것이 이 작가의 의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들이 맥락없음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앞서 인터뷰형식이라고 밝혔는데, 누구와의 인터뷰인가 하면, 이해가 잘 안되어 두번째 읽었을 때 명확해졌는데, 헥사에 고용되어 일했던 사람들이 기업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하고, 케일리도 고용된 사람 중 한명이기에 그녀도 소송에 참여시키기 위해 변호사가 설득하는 와중인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면서 케일리는 변호사가 물었던 듯한 질문에 답을 하면서 소설은 진행되는데, 변호사는 한번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문자 뒤에 숨어 있다. 이것 또한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의 형식을 상기시킨다. 카메라 뒤에 숨어있는 질문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질문자도 그렇고, 케일리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고나서는 모두 '무엇을 봤느냐'고 묻는다. 처음에는 번역체의 이 질문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도대체 뭘 묻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나중에는 이해가 되었는데, 케일리와 동료들이 했던 일이 유튜브 같은 곳에 올라오는 유해동영상을 검열하는 작업이었으니, 동영상중에는 엄청 잔인하고, 피가 낭자하고, 자해를 하거나, 폭행을 가하거나,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거나 누군가의 죽음이 목격된 영상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중에 잔인한게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나라도 그런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정말 사람을 죽이는 영상도 올라올까? 자해하는 영상도? 누구나 궁금해할만한 것이기에 작가는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소설을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잔인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영상을 하루에 수백건씩 보고 검열을 한다면 어떨까. 아주 어린아기에게 동영상을 많이 노출시키면 ADHD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어른이 매일 8시간씩 앉아서 유해동영상만 본다면? 그것이 영화에서처럼 연출된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벌어진 일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면? 그런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 같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위의 헥사라는 기업에 고용되어 유해게시물을 검열하는 일을 하다가 정신적 피해를 입고 기업에 집단 소송을 하게되는 내용이 바탕이 되고 있다. 주인공인 케일리가 고용되고부터 그만두기까지의 내용을 다루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나 열악한 노동환경 등에 대해서는 중간중간 짧게 언급이 되면서 주변적으로 다루어진다. 위에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중심에는 사랑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케일리는 헥사에 고용되면서 시흐리트를 알게된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게되고, 그러다가 둘은 같이 살게된다. 둘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술자리에서 즐겁게 어울리기도 하고, 근무시간에는 다른 층에 몰래 숨어서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이 소설의 중심에 사랑이야기가 있다고는 하나, 사실 그 이야기가 그렇게 특별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고있는 유해게시물 삭제자라는 일과의 괴리감이다.



사실 유해게시물 삭제라는 일은 사람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일이다. 반복적인 일이고, 각각의 영상을 보고 메뉴얼에 따라서 삭제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어찌보면 기계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이 보기에는 영상이 충격을 줄 수 있기에 더더욱 사람에게는 부적합한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헥사에 고용된 사람들은 마치 기계가 되기를 요구받는 것 같다. 기계처럼 앉아서 일하고, 그들이 잠시 쉬려고 일어나면 그때부터 타이머가 작동되어 카운팅이 된다. 그들이 영상을 변별해내면 회사에서 요구하는 메뉴얼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정확도를 따진다. 정확도가 80%가 되는 사람도 있고 , 95%인 사람도 있다. 회사에서는 정확도를 더욱더 높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루에 500편의 영상을 판별하기를 할당받는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주인공인 케일리에게는 주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시흐리트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만난 순간, 그녀와 나눈 이야기, 그녀와 나눈 밤들 그런 것들이 케일리에게는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소송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고, 다만 다시 시흐리트를 만나서 다시 잘 되기를 꿈꾼다.



이렇게 작가가 유해게시물 삭제자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사랑이야기를 대치시킨 것이, 그들이 했던 일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부각시키는 목적으로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소설은 또한 그들이 하는 일이 맞닥뜨리게 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헥사에 고용된 이들은 일로서 어떠한 영상이 공개되어도 될지 말지를 판단하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영상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목격되었다면,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는 걸까? 소설속에서는 언뜻, 그런경우에 어딘가에 신고하고 대처하는 메뉴얼이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유해게시물 삭제자들의 일은 영상에 담긴 위험에 처한이들을 구하는데 있지 않고, 단지 영상을 선별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상에 담긴 이들의 실질적인 안전은 부차적으로 생각하기를 강요받는 것 같다. 소설속에서 그런 점으로인해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있어보인다.



유튜브같은 매개체가 생기면서 우리는 영상을 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졌다. 그런 곳에 올라오는 영상이라는 것은 맥락이 없다. 연출된 것일수도 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을 찍은 것일수도 있고, 어제 일어난 일일수도 있지만 몇년 전에 일어난 일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런 영상들은 유튜브라는 평평한 화면상에 맥락과 정보가 제거된 채로 같은 크기의 작은 썸네일로 균등하게 보여진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다. 카메라 이면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할때도 있지만, 수많은 영상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면서 그러한 질문들은 금새 잊히게 마련이다.



유튜브가 보여주는 세상 괜찮은걸까? 그런데 유튜브에 찍혀서 올라오는 장면들은, 물론 유튜브를 위해 일부러 연출된 것도 있겠지만, 유튜브 이전에도 존재하던 것들도 많다. 누군가의 죽음, 자해, 폭행 같은 장면들. 유튜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찍을 수 있고, 찍은 것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그 이전에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이들만 목격하던 일들을 이제는 유튜브를 통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올릴 수 있게 됐을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 소설속에서처럼 유해게시물을 우리가 볼 수 없도록 선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러한 잔인한 장면을 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일은 사람이 하기에 적합한 일인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충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또한 요즘같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쉬운 시대가 되면서 증거가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생겨나는듯 하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던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가 없으니 지구는 평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사진과 영상, 소위 증거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보는 것 이면의 것들을 경시하게 된 것을 아닐까.



비교적 짧은 소설이라 두번을 읽어보았다. 첫번째 보았을 때의 풀리지 않던 의문이 두번째에서는 해소가 되기도 하고, 여전히 궁금한 부분들도 많다. 아마도 작가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자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책에서 제기하는 의문들은 이시대에 누구나 생각해보아야할 지점 같다. 또한 맥락없이 던져지긴 했지만 흥미롭게 전개가 되기에 몇시간만에 후루룩 읽히는 페이지 터너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원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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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닌 여자들 - 역사에 늘 존재했던 자녀 없는 삶
페기 오도널 헤핑턴 지음, 이나경 옮김 / 북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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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덧 얼마전 낳은 셋째까지 해서 세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다. 전부터 엄마가 되고자 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결혼을 하고자 마음을 먹기 직전까지 나는 결혼은 물론 아이에 대한 생각도 없이 살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것은, 물론 직장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을 하고 월급을 받을 뿐, 미래도 없고 이렇다할 커리어라고 할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문직이었고 내 일에 만족했더라면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아이의 엄마가 된 심리적 만족감은 크다. 이전처럼 세상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거나 삶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아도 되기는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난 6년간의 경험을 비유하자면, 숨참고 물속으로 푸 잠수를 해서 죽기 직전까지 참았다가 나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말그대로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서 아이들과 아웅다웅 하는, 기나긴 시간의 연속인 것이다. 이전의 육아가 이랬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어릴적만 생각해보더라도 어린시절의 기억은 집보다는 마을이 떠오를 정도로, 이집 저집의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늘 여러집이 모여서 같이 먹고 시간을 보내는 마을이라는 '공동체' 속의 육아였던 것이다. 굳이 마을까지 안가더라도 어린시절의 기억에는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기억이 될 정도로, 어린시절 나의 육아는 부모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과 30년만에 세상은 급변함을 느낀다.



한국이 합계 출산율 0.7이라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가운데, 몇세대 후에는 한국이 사라질것이라고도 하고, 출산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제도정 방안에 대해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안다. 현재 한국 여성들이 왜 아이를 낳지 않려는 이유는 위의 책 '엄마 아닌 여자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인인듯한 저자는, 미국의 합계출산율이 인구수를 꾸준히 유지해나갈 수 있는 수치를 의미한다고 하는 대체출산율인 2.1보다 낮은 1.7인 것에 우려를 표현했는데, 한국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수치같다.

"자녀없는 여성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생각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과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를 돕는 어머니들, 함께 사는 남성과 의학적 조언을 구하는 남성, 그들이 교류하는 모든 공동체를 제외하고 자녀가 없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차츰 깨닫게 됐다. 42쪽"

저자가 초반에는 책을 제목처럼 저자처럼 '자녀없는 여성들'에 집중해서 쓰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처럼 이 책은 훨씬 더 복합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쓰여졌고 무엇보다 자녀 없음에 대해서보다 아이를 기르는 것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여러 문화속에서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해나가고 있다.

책은 저자인 페기 오도널 헤핑턴이 시카고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쓰인 것 같다. 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지적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쓰였다. 저자의 감각은 각 챕터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반에 생각했던 부분이 연구를 해나가면서 수정되었다는 것을 서문과 에필로그에서 밝히는 것을 보면 열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책속에 종종 '우리'라고 자녀 없는 여자들과 자신이 같은 입장임을 밝히는 것을 보면 이 책이 개인적인 목소리 또한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랑말랑한 학자의 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자녀 가진 여성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반면 자녀 없는 여성을 비하하지 않고 일컫는 말은 '자녀 없는 여성'뿐이다. 11쪽"

책은 우선 저자와 같이 아이를 갖지 않는 여성을 긍정적인 형태가 아닌 '무엇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현대 사회는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낳지 않는 여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각이 가득하다는 것인데, 첫번째 챕터에서는 과거에도 지금처럼 일정비율로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존재해왔으나 지금처럼 비난받지 않았음을 밝힌다.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도 임신을 중지시키기 위해 약초들을 배합해서 먹었다는,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놀랍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러한 피임이나 임신중지를 최근까지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반대로 우생학에 기초해서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종의 여성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이 행해지기도 했다는 것도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자녀를 갖지 않은 여성이 예전에는 비난받지 않았던 이유는 두번째 챕터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육아가 부모만의 몫이 아니었고 공동체속에서 공동육아를 해왔기에 부모의 육아부담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은 구성원도 아이를 돌보면서 부모노릇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엄마'가 명사가 아닌 동사로 쓰여야함을 강조한다. 즉, 아이를 직접 낳은 생물학적인 엄마만이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책속에서 몇백년전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를 많이 낳은 집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가정에 아이를 주어서 키우게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내가 어릴적에도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않은 사람도 자식을 가질 수 없는 형제에게 맡겨져 길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물학적인 부모가 아닌 이도 아이를 데려다 키울 수 있었던 것이 한국에서는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어찌하여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아이 낳기가 점점더 힘들어지는지에 대해서 나온다. 앞서 공동체를 언급했듯이, 현대사회는 공동체라는 것이 거의 다 사라지고 핵가족화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일련의 과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예전에는 가정내에서 일을 하고 생계가 유지되던 것이, 남자는 가정 밖으로 돈을 벌러 가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여성은 집에 남아 아이를 돌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과정에서 불필요해진 공동체는 헤체될 수 밖에 없는데, 공동체가 없어진 상황에서 아이의 양육은 오롯이 엄마만의 몫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결과는 말하자면 예전에는 부부가 둘이 일하던 것이 이제는 아이를 낳고나면 한쪽만 일하게 되므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집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될 때에야 가능한, 중산층의 상징과도 같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여러 이유에 대해서 나오는데, 우선은 앞서 언급한대로 아이를 낳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서, 혼자 기르기 버거워서 낳지 않는 여자들도 많다고 말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지구를 위해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다는 부분이었다.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지구는 점점 포화상태가 되고, 일년에 천만명의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간다고도 한다. 그런걸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지구를 위해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결혼전에 아이를 낳기가 두려웠던 것은 알 수 없는 미래 사회에 아이들만 던져놓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기후위기나 환경문제, 에너지 문제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미래 사회에서 생존해갈 아이들의 걱정이 되기는 한다.

책의 내용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평이 내용요약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길게 적은 것은, 책에서 '아이를 낳고 기름'에 대해서 다각도로 조망한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그렇기에 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반대로 저자처럼 부모가 되지 않기로 한 사람들도 읽어보면 좋을 책같다. 물론 도대체 왜 한국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는 정책입안자들이 읽어봐야할 책 같기도 하다. 이 책이 왜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쓰였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주지하듯 이제는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가'를 물어야할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런 세상이 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아이를 낳았든, 낳지 않았든, 낳고 싶지만 낳을 수 없던 간에 연대가 필요함에 공감한다. 내 입장에서는 고독한 육아가 아닌 함께하는 '공동체 육아'가 가능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과 마음과 헌신을 우리가 낳지 않은 아이들, 우리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 우리 미래를 대표하는 젊은이들에게 열자는 제안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낸시 올리비는 1만명의 아이를 키웠다." 또 한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가 그리울 것이다. " 295쪽"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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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짓 - 기적을 그리는 소년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6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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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아주아주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일루어지는 초능력이라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아주 간절히 원하는 일이 사실은 나쁜 일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얘기는 "시크릿"과 같은 많은 자기계발서적에서 보아온 것 같다. 그런 책을 읽고 꿈을 시각화하고 100번쓰기, 긍정확언 같은 것을 하면서 꿈을 현실화했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 나는 그런 것을 해보진 않았지만, 아주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경험은 몇 번 있었다. 수능을 치고 운좋게 좋은 대학에 들어갔던 일과, 유학을 하려고 독일 베를린에 간 지 3일만에 거리를 걷다가 그전까지 좋아해서 많이 출연 영화를 찾아보았던 독일 배우 마티아스 슈바이히쇼퍼를 길가다가 만났던 일이다.

지금은 운빨이 떨어졌는지 기적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사실 나는 매일 세명의 기적과 함께하고 있기에 굳이 기적을 바랄 필요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이 모든 것은 어제 오늘 읽은 이 '미짓'이라는 소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밑밥이었다. '리버보이'라는 성장소설로 해리포터를 제치고 영국에서 만장일치로 카네기 매달을 수상했다고 하는 팀 보울러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소설은 말그대로 기적을 그리는 소년 '미짓'에 대한 이야기인데, 서문을 보니 팀 보울러야말로 기적을 꿈꾸고 그려낸 산증인이 아닐까 싶다. 해변가를 걷다가 불현듯 떠오른 소설의 마지막 장면. 그 장면을 붙들고 소설을 써내려가기를 10년이 되어서야 이 책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고 한다.



소설 하나를 완성하는데 왜 그리 오래걸렸던 것일까. 작가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이 소설의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속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같은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소설을 자신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직장을 다니며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매일 3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글을 쓰고 출근을 했다고 하는데, 서문을 읽으며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어떤 과정인지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자, 이제 '미짓'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미짓은 '난쟁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모욕적인 어감이 담긴 단어인듯 하다. 미짓은 주인공이 불리고 스스로 칭하는 별명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소설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미짓은 키가 작고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경련을 일으키는 여러 장애를 가진 아이이다. 미짓을 낳다가 엄마가 죽은 것을 보면 어쩌면 그러한 장애가 어려운 출산 과정에서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미짓은 외적인 여러 장애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마음은 분노로 가득차있다.



그러한 미짓에게는 여러가지 비밀이 있는듯해보인다. 늘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는데, 그것을 통해 미짓이 무언가를 아주 강렬이 원하고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미짓의 삶은 여러 상징적인 존재들이 둘러싸여 있다. 우선 언제나 사랑을 듬뿍 주는 아버지의 존재이다. 미짓의 심리적 신체적 장애를 돕기위해 상담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게 한다. 어떤 순간에도 아들을 지지하고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다음으로 형이 있다. 미짓을 낳다 죽은 엄마의 죽음이 미짓의 탓으로 생각하고 밤마다 몰래 미짓의 방으로 가서 미짓을 학대한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늘 미짓에게 다정한 형인척을 하기에 누구도 그런 학대를 알아채지 못한다. 형이 가장 바라는 것은 미짓의 죽음이다. 어머니를 죽게한 댓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의 여자친구인 제니는 미짓에게 빛과 같은 존재이다. 미짓을 사랑하지만 형에대한 진실을 볼 줄 모르는 아버지와 달리 제니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갖고 있고, 미짓을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도 갖고 있다.



미짓은 형으로부터의 학대와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짓눌려있었다. 그러한 그를 희망으로 끄집어낸 존재가 바로 배를 만드는 조셉이라는 노인이다. 미짓은 조셉의 도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알아갈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담사 패터슨 박사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서 미짓은 자신의 꿈을 그려나가고, 중간에 방해를 받아가 결국에 그 꿈을 이룰 수 있게되고, 자신에게 꿈을 그리면 이루어지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된다.



소설속에서 가장 집중되었던 것은 미짓과 형과의 관계였다. 형은 미짓을 증오하고 죽기를 바라는데, 미짓도 그렇게 자신을 증오하며 고통만을 안겨주는 형을 증오하며 죽기를 바란다. 소설속에서는 좀 극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어머니를 향한 갈망과 그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경쟁하고 다투는 모습은 여느 형제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 같다. 그것이 상대의 죽음을 바랄만큼 치열한 것인가 하면, 남자형제와 같이 자라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런 순간도 있었던 것 같다.



소설속에서 미짓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머릿속으로 그린 것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시종일관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강렬히 원하는 모습이었다. 미짓의 그러한 모습은 말도 행동도 제대로 못하고, 심지어 경련과 발작이 오는 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구제불능의 신체와 너무도 대비를 이룬다. 불편한 신체를 가진 것 만큼 강렬하게 미짓을 그 꿈을 이루기를 원하고 모두가 그것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때에도 그 꿈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런 미짓을 보면서 나는 그러한 꿈이 있던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꿈꾸던 것이 있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피로할때,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안된다고 체념하고 놓았던 적은 없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순간도 잊지 않고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한다면 못이룰 것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강렬히 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책을 읽고나니 내 삶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깊이 빠져들어 읽은 책이 끝나버린 데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강렬히 원하는가, 다시 묻고싶은 날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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