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력 - 엄마의 힘이 아이를 성장시킨다
장나영 지음 / 라온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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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생에 주기마다 성장해 나갈때 엄마로서 잘 성장해 나가고 있는지, 혹시 어떤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때는 그 고민의 결이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의 첫째 아이도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최근에 소개받은 책중에 초등학교 교사로서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초등학교 생활과 엄마의 역할에 대해 쓴 책이 있길래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곳에 소개해보려고 한다.



바로 장나영 작가의 '엄마력'이라는 책이다. 엄마력이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무슨의미로 쓴 것인지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제대로된 엄마로서의 부모노릇, 엄마의 아이에 대한 영향력 정도로 해석해보면 어떨까 한다.



우선 책 날개의 작가소개부터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대로 초등학교 교사로서 20년을 재직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와중에 세 아이를 낳아 길렀다고 한다. 녹록치 않은 삶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특별할 것 없는 경력이지만, 한 분야에서 20년을 종사했다면 분명히 그 사람의 말은 들을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어볼 마음이 들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목차의 첫번째 두번째 챕터였다. 초등학교의 실상이 어떤지 궁금했고, 교사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인상깊은 학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이다'라는 소제목이 달린 챕터를 읽으니 덜컥 겁이 나기는 했다. 잘못된 훈육과 무분별한 미디어 노출, 불행한 부모에게서의 양육의 영향으로 요즘 아이들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는 '금쪽같은 내새끼'와 같은 TV프로그램에서 간접적으로 접한바 있다. 전직교사의 말을 들으니 더 긴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은 예를들면, 성에 대해서 빨리 접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 그리고 한반에 ADHD 아이의 비율이 거의 1/3정도 된다는 것, 그리고 부모들이 결혼을 절대 하지 말라거나 부모가 되지 말라고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아니구나 싶다. 부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다고 느껴지면 자식에게 결혼을 하지 말라거나 부모가 되지 말라고 할까. 씁쓸해진다.



그럼에도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다행스럽고 한편으론 고마웠던 것은, 작가는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를 만났을때 포기하지 않고 학부모와의 상담과 아이에게의 훈육등을 통해서 1년동안 차근히 아이를 바꿔나가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아이들이 바뀌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고 하니, 학교에 이분과 같은 선생님이 계시는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2장의 '내가 만난 학부모님'의 챕터를 보면, 학부모가 될 입장에서 어떤 태도를 경계하고 어떤 모습의 학부모가 되어야할지 알 수 있다. 요즘 교사의 자살로 인해 교권이 추락하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학생이었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이슈에 대해서 양가감정이 생긴다. 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학교에는 존경할만한 선생님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별다른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셨고, 그중에 20퍼센트 정도는 몇몇 아이들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금의 교권이 추락한 것은 그런 폭력적이고 전혀 존경스럽지 않은 선생님들이 존재했기에 교권에 대한 거부감이 쌓여왔기에 그런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었고, 현재는 아동학대에 대한 어찌보면 지나친 경계때문에 교실에서 체벌은 사라진지 오래일거라고 생각이 든다. 반면 선생님을 존경하는 아이들도 없는 것 같아서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는 한다. 그런 점은 선생님이나 학교차원에서 변화시키기 어려운, 대입과 그와 관련한 평가까지가 첨예하게 관련이 된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입시제도가 바뀌고 학교에서의 수업을 학생들이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느끼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은 가질 수 있게 아이를 지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작가를 비롯한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학원이나 학습지 선생님과는 '급'이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을 학원선생님이나 학습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며 불만을 나타내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지, 학원선생님이나 학습지 선생님은 존경은 덜 존경하고 학교 선생님을 가장 존경해야하고, 그런 문제는 아니지 않나 싶다.



그외에 3장부터 5장까지는 엄마로서 어떻게 아이를 길러내야할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앞서 1, 2장에서 언급되었던 학교의 현실에 맞서서 엄마는 어떻게 아이들을 길러야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다양한 조언들이 나오는데, 읽다보면 '이 조언들은 어떤 아이로 기르기 위한 것들일까' 궁금해진다. 서문을 읽어보아도 그점이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133쪽에 '하버드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부분이나, 그 뒷부분에 한중일 사람들은 구글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부분을 보면 어렴풋이 알 것 같기는 하다. 아마도 '창의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인재상'정도일까? 하버드나 구글에서 원하는 인재상이 한국에서도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가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에서 어떤 인재상을 그리며 아이를 길러내는 것이 최선일까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씁쓸하다. 많은 부모들은 선행을 시키고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이런저런 학원에 보낸다고 한다. 좀 더 많이 놀고 건강하고 즐겁게 아이들이 자란다면 더 행복할 거라는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그렇게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 몰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불안에 기초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이사를 왔다. 전교생이 60명이 채 안되는 작은 학교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이곳에는 학원을 보내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경쟁을 없애고, 말그대로 많이 놀고, 그것을 통한 행복속에서 아이들이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의 선택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옳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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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재킷 창비청소년문학 127
이현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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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서평단에 당첨되어 읽게된 이현의 소설 라이프재킷이다. 이현작가가 밀리언셀러 작가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서평단을 신청한 것은 우선 많이 읽힌 작품을 썼다고 하니 탄탄한 기본기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두번째로는 바다를 배경으로한 소설이라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좋을 소설일 것 같아서(휴양지에서 읽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리고 세번째로는 나의 모국어로 씌어진 소설을 읽는 기쁨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책은 나의 세가지 기대감을 어느정도는, 아니 기대이상으로 충족시켜주기는 하였다. 책은 한번 읽기시작하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다. 그것은 재미가 있다는 뜻이고, 또한 잘 쓰여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앞서 말한 기본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재밌는 소설이니 당연히 휴양지에서, 혹은 힐링이 필요할때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이 결고 가볍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번째로 모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 기쁨도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몇몇 부분에서 작가만의 독특한 어휘사용을 느낄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작가의 연령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이상의 문학적인 표현이나 내 세대의 문학적 어휘를 뛰어넘는 표현은 드물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이해서는 적어도 2000년대 이전의 예전 한국 문학을 읽어야할런지 모르겠다. 여튼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만족스러운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러나' 혹은 '그런데'가 등장할 시간일까. 앞서 밑출친 부분에서와 같이 책에 대해 한정적인 호평으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는' 하였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할 것 같은데, 우선 책의 내용을 좀 살펴보고 말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이 책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편지에 쓰인 바를 반영하듯 바다,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을 받고 바다와 요트를 가지고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심히 궁금증이 일었었다. 얼마전에도 마찬가지로 요트를 주제로한 '미짓'이라는 소설을 읽은 바가 있었다. 그 책도 재밌기는 하였지만 내용면에서는 실망감이 들기는 하였기에 이 소설은 어떨지 궁금했던 것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은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는데, 그 가운데는 '고은'이라는 아이가 핵심인물인 것 같다. 사건의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사건과 관련이 되는 인물들같의 연결고리같다고 할까. 고은이 개학날 등교를 하고보니 같은반 친구들 몇몇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고은은 어제 남자친구였던 천우가 sns에 올린 '우리 요트 탈래?'라는 피드를 알고 있었기에 학교에 나오지 않은 친구들이 혹시 천우와 같이 요트를 타러가서 학교에 안나온 것은 아닐까 예상을 하게된다.

역시 고은의 예상대로 천우를 비롯에 그의 이복동생 신조, 장진, 태호, 류는 천우의 피드를 보고 해안에 모였고, 모두 친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천우와 신조는 집안 사정으로 부산을 떠나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배 천우신조호는 압류딱지가 붙고 몇달간 운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요트를 타고 항해를 나서게 된다. 단 몇시간, 부산을 떠나기 전에 가볍게 다녀오리라 생각했던 항해는 출발하고 배의 전원이 나가고, 어디인지 모를 바다를 부유하고, 예상치못한 사고가 나고 하면서 살기위한 필생의 몸부림으로 바뀌게된다.

책을 읽고 며칠간은 뭐라 써야할까 고민이 많이 들었다. 책은 술술 읽혔지만 내용은 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젊은 날의 가벼게 생각한 행동 하나가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큰 댓가로 돌아오는 것을 나는 직접 목격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할까를 고민해봤다. 재밌게 술술 읽히는 소설로서, 하루이틀의 유희의 수단으로 보면 되는 것일지, 젊은 날의 치기어린 실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야하는 것일지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잘 맞춰진 퍼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가 소설을 읽을때 무엇을 기대하는가, 반문해보았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것은 '감동'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읽고 내가 감동을 받았는가, 하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왜 그럴까를 자문해본다. 재미도있고 교훈도 주는 소설이 감동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느끼기에는 모든 요소가 너무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그래서 잘 짜였다는 느낌이 든다. 등장인물 모두에게도 적절한 비중이 분배되고, 주인공에게는 주인공에 맞는 비중이 분배된 느낌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결말도 소설을 잘 마무할 수 있는 임펙트를 주기에 충분하다. 결말을 읽으면 왜 제목이 '라이프재킷'인지 바로 알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잘 짜여짐'과 '균형감'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 정해진 관광코스를 잘 둘러보고 끝나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내용적으로는 분명 일탈이지만, 문학적으로는 관형적이다. 그 균형감이 어딘가에서 좀 뒤틀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비중에서도 그렇다. 소설을 다 읽을때까지도 감정이입이 되거나 아끼는 인물이 생겨나지 않았다. 계량 스푼으로 분배하듯이 골고루 인물소개가 들어간듯한 느낌이 든다.

마무리하자면, 휴가지에서 읽을 페이지터너를 고른다면 적극 추천한다. 나같이 뒤틀린, 불균형적 감동을 원하는 이는 아마도 (사놓고 못읽고 있지만) 모비딕을 읽어야할런지 모르겠다. 대신 가독성이 매우 떨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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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2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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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2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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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분쟁으로 보다, 세계사 - 현대의 주요 분쟁들로 이해하는 세계사, 2024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보다 역사
송영심 지음 / 풀빛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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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었을때 어안이 벙벙했다. '요즘 세상'에 세계 어딘가에는 아직도 전쟁을 시작하는 곳이 있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뒤로 연일 유튜브에는 차마 눌러볼 엄두가 안나는 잔인한 뉴스들이 올라왔다. 전쟁의 실상이란 이런 것이나 싶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나는 운좋게도 한국이라는 지금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안전한 나라에서 가족들과 비교적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국에도 지난 역사를 보면 피로 얼룩진때가 왕왕 있었다. 군사독재 시절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목숨을 건 투쟁을 했던 선대의 노력과 희생으로 지금의 내 삶이 가능한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여전히 암흑속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번에 읽은 '국제 분쟁으로 보다, 세계사'를 통해 내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무심했는가 새삼 깨닫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저자인 송영심은 역사교사로 40년간 교편을 잡으셨다고 한다. 세계사에 대해 책을 여러권 쓰셨고, 전쟁없는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셨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분쟁 속의 세계사를 쓰신 것이 단순히 정보전달의 목적이 아닌 그러한 잔혹한 현실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염려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목차를 보면 열세가지 분쟁, 혹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을 소개한다. 얼핏 들어본 나라도 있고 처음 듣는 나라도 있었다. 첫번째 사례는 비교적 최근에 전쟁을 시작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여섯번째 꼭지에 나와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다양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같이 영토분쟁인 경우도 있고, 쿠르드족이나 미얀마 내의 로힝야족처럼 소수민족을 탄압도 있었다. 코소보 전쟁처럼 종교갈등으로 인한 전쟁도 있었다. 또한 이라크 걸프전처럼 주변국이나 강대국의 이권다툼에 얽혀서 약소국이 전쟁을 하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소국 내에서는 힘이 약한 여성이나 아이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일도 많음을 본다. 차마 읽기 어려운 내용도 많았다. 나는 이제껏 그런 기사는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편이었다. 앞서서도 말한 것처럼 무력감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관심을 갖는다면 세계 어느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체계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모르는 나라가 많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알지만 평화를 이룰 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럴수도 있겠다.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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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돌아가는 사랑 - 월트 휘트먼 시집
월트 휘트먼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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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껏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때 국어시간에 문학과 시를 '배우기'는 했지만 문학과 시를 '배운다'는 건 어떤 걸까. 주제는 무엇이고, 화자는 누구이며,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는 등 그것은 소위 '정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었다. 문학에 답이 있는가. 나는 답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에 공감을 할 수 없었다. 맞고 틀리고로 가르는 문학수업에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지금에야 내가 문학과 책읽기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지만 당시에는 국어시간이 고통이었다.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어를 통해 나는 문학의 묘미를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독일어로 책을 읽음을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독일 방송에서 문학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서 사람이 문학을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가, 사람에게 문학이 어떠한 존재일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특히 독일어권 사람들에게 '시'는 특별했다. 우리나라에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는 안중근 의사의 말이 유명하다. 독일에서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독일어권 사람들에게 시는 특별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 대해서뿐아니라 '시'에 대해서도 내가 뭔가 세상에 존재하는 특별한 아름다움 한가지를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늘 존재했다. 그래서 아티초크 출판사에서 월트 휘트먼 시집 '바다로 돌아가는 사랑'의 서평단을 모집한다고 했을때 냉큼 신청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대감과 한편으로 두려움을 가진채로 말이다.



시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게 있을까? 내가 무엇을 느껴야할 지 모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있는 그래도의 시를 천천히 음미하고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그래도 와닿는 게 없으면 그만인 것이고, 뭔가 느꼈다면 그시가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인 게다.



우선 책 날개의 시인에 대한 소개를 읽어본다. 맥락없는 읽기도 좋지만 워낙 유명하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월트 휘트먼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두세기 전에 태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편집자나 인쇄기술자등 출판계통에서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만 읽어봤을 때는 자연속에서 자연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유롭게 살아간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다.



추천사를 보면 쟁쟁한 작가나 학자들이 그의 시에 애정을 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나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두사람 있다. 바로 '토마스 만'과 'E.M. 포스터'이다. 토마스만은 좋아하고 싶은 작가이고 E.M. 포스터는 영화화된 그의 책에 흥미를 가졌었다. 어쨌든 추천사를 보니 그가 어느시대에 많이 읽혔는지 대략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를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시에서도 주제는 다른 문학장르에서처럼 '인간사'일거라 생각한다. 누구는 사랑을 노래하고 인간의 고통을 노래하기도 하고 꿈이나 희망, 자유를 노래하기도 할 것이다. 월트 휘트먼의 시에서는 우선 '나'라는 존재가 강하게 드러난다.



나는 자아를, 평범한 개인을 노래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적이라는 말, 집단이라는 말을 표명한다

20쪽, '자아를 노래한다 One's-Self I sing'





그러나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나'는 사사로운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자유롭고, 강하고, 단단하면서도 열린 존재로서의 나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너',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와 동등해보인다.


나 찬미하노라 나 자신을, 노래하노라 나 자신을.
그대도 내가 하는 대로 하라,
나를 이루는 모든 원자, 그대 또한 이루고 있으니.
22쪽,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그의 시에서는 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와의 어우러짐을 노래한다.

나의 영혼은 맑고 향기로우며, 나의 영혼이 아닌 모든 것 또한 향기롭구나.
26쪽,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나는 나 자신의 특질을, 그리고 건강하고 깨끗한 사람의 모든 신체기관과 특질을 환영한다.
한 치라도, 그 한 치의 입자 하나라도 더러운 것은 없으며, 그 어느 것 하나까지 덜함이 없이 모두 똑같이 두루 알게 되리라.
27쪽,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김춘수의 '꽃'을 보면 다른 대상을 내가 명명함으로 인해 비로소 존재한다 부분이 나온다. 어떻게보면 인간의 오만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월트 휘트먼은 대상을 그 반대이다. 나와 다른 대상이 동등하다고 여기며 대상을 정의하려하지 않는다.


풀이 뭐예요? 어린아이가 풀을 한 움큼 뜯어 와 물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풀이 무언지 그 아이가 모르듯 나도 모르는데.
31쪽,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거의 두세기 전의 사람인데, 여성과 남성에 대해서도 아이나 어른에 대해서도 곤궁한자나 부자에 대해서도 편견이나 차별적 시선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나가는 낯선 이여! 내가 얼마나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대를 바라보는지 그대는 모른다
그대는 내가 찾던 남자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찾던 여자일지도(꿈처럼 떠오르는 생각이다)
57쪽,지나가는 낯선 이여 To a stranger


읽다보니 마치 나에게 쓴듯한, 후대에 그의 시를 읽을 사람들에게 쓴 시가 보인다.





생기에 가득찬 지금 옹골지고 눈에 보이는 나, 나는 마흔 살, 미국은 여든세 살,
지금부터 백 년 뒤 혹은 수백 년 뒤에 올 사람에게,
이 글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대에게, 그대를 찾아 바친다오,
그대가 이 글들을 읽을 때면 눈에 보이던 나는 보이지 않으리니,
이제 옹골지고 눈에 보이는 그대가 나를 찾아 나의 시를 실현하고,
내가 함께 있어 그대의 동지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이여,
옹골지고 눈에 보이는 이, 그대여,
나는 그대와 함께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오.
(하여 내가 지금 그대와 함께 있지 않다고 너무 확신하지 마오.)

- 67쪽, 생기에 가득찬 지금 Full of LIfe Now


그의 시를 읽으면서 역동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 감사함을 갖게 된다. 하루하루 숨쉬고 생각하며 내가 만나는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나의 주인은 나이기에 그들과 얼마든지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나를 둘러싼 생명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낀다. 시 속에서 너와 내가 동등한 존재로서 연결되듯이 이 시를 썼던 월트 휘트먼과 우리는 시를 통해서 연결된다. 그는 어쩌면 시를 통해 생명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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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략 - 소설의 기초부터 완성까지 오에 컬렉션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성혜숙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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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세가지 층위를 갖고 있어야한다고 들었다. 예를들어 '82년생 김지영에서는 현재라는 층위가 있고, 주인공 김지영이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할때의 층위, 그리고 그로부터 훨씬 전인 어린시절이라는 세개의 층위가 존재한다. 이번에 내가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책 '소설의 전략'은 소설은 아니지만 세개의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양한 관점에서 책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책이 가치있다는 뜻 아닐까.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오에 겐자부로라는 무거운 이름.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1935년 일본 출생의 소설가이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책 중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인생의 친척'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두 자녀가 자살을 하고, 엄마는 둘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살아남아 둘의 죽음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기억한다.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었던만큼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가 내 뇌리에 각인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그랬던 그에 대해 이번 기회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도 됐지만 책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목을 보면 소설을 잘 쓰기위한 전략집 같은 느낌이고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앎'이 아닐까 한다. 앎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부의 제목에 나와있기도 하고 1부의 첫번째 글 초반에도 언급된다. 즉, 그가 소설쓰기에 대한 강연을 하고난 뒤 관계자들과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 이야기가 소설의 영역에서 앎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그러면서 그러한 대화를 통해 발전시킨 생각들을 적어보고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데, 여기서 '앎'이라고 하면 책읽기를 통한 앎을 말하는 것 같다.



목차를 보면 20여편의 글들의 묶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몇몇 작가들은 반복되어 언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니것이나 윌리엄 블레이크,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같은 작가 혹은 학자들이다.



몇몇 작가들이 반복되어 언급되는 이유를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그는 2,3년 동안 한 작가의 작품에 몰두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런만큼 그가 그 작가들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깊다는 것도 알 수 있고, 그가 쓰는 것 만큼이나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또한 놀라운 점은 그의 독서편력의 방대함이다. 여기서 그와 나의 접점이 생기는데, 다른 작가들은 처음 들었거나 이름만 들어봤는데,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내 마음 속에도 깊이 자리한 학자이다. 내가 읽은 책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민속학에 심취해있을 때 아마도 '샤머니즘'을 읽었을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 또한 엘리아데에 깊이 심취해 있었던 것을 보면 그와 나는 넓게보면 동양적인 사상을 공유하거나 적어도 공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소설 읽기의 관점이 이 책의 첫번째 층위라고 한다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두번째 관점이 될 것이다. 바로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 발견하는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가 어떻게 소설을 써왔는지에 대해서 만큼이나 어떻게 책을 읽어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한작가의 책을 2.3년씩 읽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아들이 장애아로 태어난 뒤로 그의 소설에도 장애인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반영했다는 것 등을 보면 그가 한가지의 화두에 깊이있게 빠져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매우 유머러스하다. 그가 자살시도를 하고 실패했다는 데 대해서 그의 동료가 "어떤 일을 실패하다니 당신답지 않다"고 한일이나, 그의 아내가 "현재 집필중인 소설이 있어서 당장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거"라고 담담히 그들의 말을 옮긴 부분에서 웃을수는 없지만, 그의 유머감각을 발견하기엔 충분할 것 같다.



중간중간 반핵에 대한 목소리도 내고 있고, 읽다보면 그가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 책을 읽는 세번째 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책이 쓰인 시점의 시대를 보는 것이다.

초반에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오래전에 쓰인 책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책을 대하는 진중함이 '요즘 사람'같지 않아서이다. 소설가이지만 철학서, 시, 민속학서 등 읽는 책의 스펙트럼이 넓은것이 (내 생각이 맞다면) 철학과 인문학이 학문의 중심이었던 과거의 지식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소설 맨 마지막을 보니 이 책은 1984년무렵 어느 잡지로 생각되는 곳에 연재된 글의 모음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쓰인 책인 것이다.



또한 이 책을 보면 그가 '핵무기'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갖고있는 것을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앎'과 함께 이 책의 전반에 흐르는 어두운 공기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인의 관점으로보니 1980년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터진지 불과 30여년밖에 안된 시기이다. 얼마전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니 묘했다. 오펜하이머가 강의하는 대학에 들른 일 등이 언급되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핵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이 되었지만 그가 핵무기에 대해 고민이 깊은데 대해서 내가 공감이 잘 안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얼마전에 독일에 살았던 홀로코스트 생존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 '나의 인생'을 읽었다. 그리고 이 책 '소설의 전략'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점이지만 유대인으로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와 일본인인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한국인인 내가 기억하는 혹은 느끼는 2차 세계대전이 각각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에 겐자부로의 입장에서는 핵의 위협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또하나의 재미라면 재미고 난관이라면 난관인 점을 언급하고 싶다. 바로 번역의 껄끄러움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때 일본어를 약간 배워보고 한문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번역하신분이 일본어에서 쓰인 한자어의 음을 그대로 옮기신 것 같은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대공황이라고 번역할 부분을 '대불황'이라고 옮긴 것 같은 부분 말이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이해가 잘 안가서 여러번 읽은 문장이 많다. 하지만 일본어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유추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해가 잘 안되는 글을 '해독'하는 것이 나의 오랜. 고상한 취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느정도 각오가 필요해보인다. 하지만 읽고나면 요즘 술술 잘 읽히는 책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소설의 전략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오에 겐자부로를 발견하기 위해서 볼 것인가, 시대의 거울로 볼 것인가. 혹은 내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다른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할 책임은 분명하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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