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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흔 고독한 아빠
이시다 이라 지음, 이은정 옮김 / 살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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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마흔 아저씨의 감성이 내게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나온 영롱한 표지를 보고는 반해버려서 서평을 신청해버렸다.(...) 표지가 예쁘긴 정말 예쁘다. 표지에서도 홀로 남겨진 중년 아저씨가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쯤 되면 책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갔다. 우리네의 보편적인 아저씨들이 그러하듯,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해 가족을 부양해왔지만 자식들은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멋대로 제 인생을 살러 떠나버리고.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진부한 스토리와는 정반대의 책이었다. 오히려 매우 젊고 섬세한 신세대의 감각이 느껴지는 책이다.

주인공 아오다 고헤이는 자신과 아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그런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만년 1쇄 출판의 '안 팔리는' 10년차 소설가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직업에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그의 벌이는 일반 회사원과 다를 것이 없다. 사실 회사원보다 훨씬 나쁜 조건이다. 비정규직에 복지 혜택은 없고 정년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갚아나가야 할 아파트 대출과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까지 있는데, 책이 팔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고헤이는 이런 현실적인 고민과 싸운다. 너무도 우리네 삶처럼 일반적인 갈등과 고민을 겪고 있어서 공감하는 한 편 읽는 내내 작은 웃음이 머금어 진다.

생각보다 마흔 아저씨는 훨씬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는 20대인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40살 아저씨가 그럴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는 정말 소심하고 마음이 약하다. 같은 시기에 데뷔한 이소가이의 훌륭한 신작을 읽고 질투에 불타올라 며칠 동안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내 모습과 똑같았다. 참 인간적이다. 마흔이 되어도 똑같이 감정의 덫에 걸리고 자책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역경을 극복한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해서 자란다. 매우 의외지만 그런 면에서 이 책도 분명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다른 성장소설과 달리 이 책의 차별성은 역시 주인공이 10대 20대와는 다른 원숙함을 가진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압감 있고 너무 무거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만의 따뜻하고 사려깊은 원숙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와 아들 가케루를 대하는 자세, 장모와 편집자를 대하는 자세에서 은은하게 배어난다.

 

 

고헤이는 자신의 문제를 죽은 아내에게 부탁을 한 적이 4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글쓰기는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로 원래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늘 다잡아야 하며 그것만이 기댈 곳이다.

- 262p

그렇다면 아버지로서 가케루를 칭찬해줘야 할 터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그 멋진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살아갈 힘의 근본 아닌가. 연애로 인해 힘든 인생이 얼마나 보상받는지 모른다. 사람은 하나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 정도로 사랑의 힘은 강하다.

- 287p

 

 

상황마다 발휘되는 작가로서의 통찰과 크고 작은 신념은 고헤이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런 능력은 실제로 인생을 겪어내지 않으면 체득할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는 둔해서 자신만 인식하지 못하는 인품을 남들에게는 언제나 인정받고 있는데(그는 자신이 항상 과대 평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또한 긴 세월을 착실히 살아내어 켜켜이 쌓아올린 결과물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던 것은 책이 평범한 인간이 평범한 고민과 사건들을 겪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충격적인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헤이는 자신이 마주한 사건들 중 어떤 것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겪어낸다. 자신의 집필과 슬럼프도, 짧은 연애도, 아들의 학교 문제도,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살아낸다. 삶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련의 시련들을 충분히 헤메이는 과정에서 삶이란 저마다의 가치를 띄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사건들을 대하는 고헤이의 모습에서 그의 진국을 맛 보는게 즐거웠나보다. 칫치는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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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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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는가? 간단한 질문이지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사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자신의 가치관이 주류라고 여겨진다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쉽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상을 가졌다면, 그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만약 그것이 범죄에 가까운 생각이고, 실행에 옮겨진다면 법의 심판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별 수없이 내버려 두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물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책 <편의점 인간> 속에서는 그렇다. 사람들은 호시탐탐 주인공을 야단칠 기회를 노리고, 끌어내서 '고치려고'한다. 주류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물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 무라타 사야카는 “후루쿠라는(주인공) 나쁜 짓이라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살아?’ 소리를 듣게 된 사람을 그리고 싶어 만든 인물”이라고 말한다. 책에서 주인공 후루쿠라는 결혼하지 않고 직장을 가지지 않은 30대 후반 여성이다. 18년째 같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동년배의 친구들이 결혼 육아 직장 중 하나 이상 가진 것과 달리 정체되어있는 그녀는 '왜 결혼하지 않아?', '왜 아직 아르바이트를 해?'라는 질문을 받는다. 정작 그녀는 편의점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데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솔직한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어한다. 결혼과 직장을 원하지 않는 것은 '보통 사람'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후루쿠라는 자신에게 '고쳐져서' 정상화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보통 사람'에 맞춰질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그녀에게 편의점은 알 수 없는 사회와 달리 확실하고 간단한 매뉴얼을 제공해준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지만, 편의점은 그녀에게 단순 명료한 가치 체계를 부여한다. 편의점은 친절하게도 손님에게 어떤 목소리 톤으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어떤 움직임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준다. 그래서 그녀는 편의점 점원이 되고서부터 자신은 '새로 태어났다'라고 생각한다. 편의점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는 주어진 매뉴얼 대로 움직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던 정확한 생활양식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후루쿠라는 이를 감사히 받아든다. 이 '매뉴얼'과 그 세계인 '편의점'은 후루쿠라에게 안정감과 자유를 선사한다.

 

사회화의 폭력성?

이 소설에서는 '사회화'의 폭력성이 느껴진다. 사회는 기준을 벗어난 주인공을 계속 질책하고 함부로 개조하려 한다. 똑같은 인생의 절차를 밟으라고 강요하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시켜버리는 세상은 디스토피아 같다. 학창시절의 나는 학교가 모두에게 똑같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기준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각자의 개성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이 매우 비인간적이며 어떤 강요나 전체주의보다 악질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의 통제권을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커다란 것에 빼앗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를 남들과 똑같은 생각과 욕구를 가지도록 만들려고 하는 그 어떤 것이 두려웠다. 이것은 그때의 내가 가진 사회화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사회화라는 것이 그렇게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일까?

'사회'라는 것은 인간이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 없이는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군집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 집단 속에 살아가면서 인간은 삶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인간을 세상에 적응시키고 의미 있는 삶을 꾸려가도록 도와준다는 면을 '사회화'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반대로 사회 구성원을 획일화시키고 기계 부품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잘못된 사회화다. 그 시절의 내가 지레 겁먹었던 것은 이런 사회화의 어둡고 잘못된 단면만을 거대하게 키워서 보았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는 모두를 같은 색깔로 물들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고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후루쿠라는 '점원'으로 편의점에 소속되기 위해 쉬는 날에도 다음날의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컨디션을 관리한다. "시급에는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까지 포함된거야"라고 16년전 만난 두번째 점장이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비실비실해서 일을 못하는 '쓸모 있는' 점원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도 갈아치워지고 말 것이다. 사회에서도 우리는 유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자기소개서를 쓰고는 한다. 그렇다면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정말로 그렇다면 세상에는 자신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넘쳐서 자살률이 급증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실제의 세상은 그렇게 냉혹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만의 빛나는 가치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19년째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 작가 무라타 사야카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배제되는 것이 현대사회라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저 자신도, 제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도 저는 소설이나 일상에서 어떤 풍요로움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풍요로움을 저는 늘 믿고 있어요."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직원을 뽑을 때 회사는 공인된 외국어 실력과 실무 경험을 필요로 하고,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나 특별한 인성을 조건으로 삼을 수도 있다. 수많은 지원자 중 회사에 쓸모 있는 사람을 고른다. 많은 청년들이 회사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고통스레 발버둥 치지만, 나는 이게 그리 잘못된 일이라고마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르게 생각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개인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기술>에서 저자 유시민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존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나는 이런 유시민의 관점이 좋았다. 이것이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의점 인간>에서의 편의점과 사회, 그리고 실제 사회에서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라는 주문은 같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 한 끗 차이로 의미는 정반대가 된다. 학창시절의 나는 <편의점 인간>같은 소설의 디스토피아적인 면에 매료되어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사회가 그렇게 잔혹하고 무서운 곳인 줄만 알았고, 사회에 던져지는 것이 매우 불안했다. 실제로 사회는 능력 없는 이에게 가차없고 잔인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사회라는 것에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바에야 현실을 인정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기쁨을 누리며 자신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삶을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 후루쿠라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인간인 것 이상으로 편의점 점원이에요"라고 외치고서는 편의점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편의점 직원이기 때문에 살아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편의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편의점 인간이 되기를 택한 것은 그녀 자신이다. 작가는 "그(편의점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결말이 된 거죠"라고 후루쿠라의 선택을 설명한다. 편의점은 그녀에게 단순한 일터 이상의 의미다.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그녀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된다면 언젠가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뿐인 후루쿠라도 더 이상 어떤 기분 나쁜 추궁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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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커피 - 음악, 커피를 블렌딩하다
조희창 지음 / 살림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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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가 그날 저녁에 백 선생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젊었을 때 생각했던 쇼팽과 지금 생각하는 쇼팽이 많이 달라졌냐고. 그러자 백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응, 나이가 드니 안 보이던 게 보여. 이젠 쇼팽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89p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적당한 길이의 글 한편은 참 '읽기 좋다'고 느껴진다. 정말 향기로운 커피 한 잔 같은 글이다. <베토벤의 커피>가 그랬다. 특정 커피와 클래식 혹은 음악가를 정해 잡학 다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동네 카페에서 다양한 주제로 즐겁게 수다 떠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늘어지지도 않는다. 저자 조희창은 태생 이야기꾼이다. 그는 커피, 음악, 역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는다. 책을 읽다 보면, '커피와 클래식으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구나'싶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저자가 운영하고 있는 양산 통도사 앞에 있는 카페 '베토벤의 커피'에서 가볍고 즐거운 교양 수업을 듣는 것만 같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카페에 대한 저자만의 애정 어린 묘사가 가지 않아도 이미 그곳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 집의 아침은 고양이들의 수선스러움으로 시작한다. 아내가 먼저 일어나 고양이들의 밥을 챙기고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내린다. '오늘의 커피'를 갈아서 드리퍼에 털어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동그랗게 돌려 부으면, 카페 안에 커피 향이 차오르면서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진다. 그러고 나서 커피잔에 코를 들이대고 입술을 적시면 그제야 잠은 달아나고 진짜 아침이 시작된다.

-26p

 

통도사 앞 평화로운 카페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의 글에는 다양한 손님과의 만남의 새로움, 생활의 사소한 즐거움이 잔뜩 묻어난다. 그의 문장으로 시골 카페에서의 하루하루를 음미하는 그의 삶을 슬쩍 엿볼 수 있다. 시골에 내려와 카페를 운영하는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 커피와 클래식 음악이다. 저자는 너무도 다채롭고 끝없는 커피와 클래식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유영한다. 그리고 그 행복함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한 챕터의 마지막 장에는 항상 저자가 직접 고른 음반 두 장과 3개의 공연 영상이 있다. 나는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 마지막 장을 먼저 펼쳐서 영상 QR코드를 찍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서 글을 읽었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커피와 음악 이야기를 읽다 보니 순식간에 책장이 넘겨진다. 책 뒤표지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적어놓은 "알지 못해도 음악은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알면 더 잘 들린다."라는 소개 글이 너무도 적절하다.

 

나는 클래식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고 커피에 대해서는 동네 카페의 메뉴밖에 모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베토벤의 커피>는 커피와 클래식 입문을 도와주는 아주 적절한 책이었다. 좋은 친구와 가볍게 나누는 대화처럼 이 주제에 빠져들었다. 이 책 덕분에 예민해서 아무 음악이나 듣지 못하고 있는 내게 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고, 커피전문점에서 하나씩 특정 원두를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여유를 더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해서 기쁘다. 주옥같은 음악과 뮤지션을 소개해주는 책에 기대어 조금씩 클래식에 발을 담가 보려 한다. 친절한 가이드북이자 따뜻한 안식처 같은 책 한 권이 생겨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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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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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섹슈얼리티(성별)'는 무한한 바다다. 최근에야 인간은 이 망망대해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비전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그것이 사회의 변혁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성(性)을 남성 / 여성의 두가지로 생각한다. 이제서야 인간은 그 이분법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여성은 '여자라는 성'으로 인해 고통받는가?" 이 질문은 절규로, 분노로, 슬픔으로 표현되어 '공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공감을 통해 이루어진 '연대'로 사람들은 모이고 모여 사회에 정중한 '변화'를 '요청'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양상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멀리 갈 수 있는 배」는 이와 똑같이 "왜 여성은 '여자라는 성'으로 인해 고통받는가?"를 고민하지만, 최근의 베스트셀러들처럼 사회 운동을 장려하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알려주는 도서는 아니다.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이 책은 독자가 개인의 차원에서 안으로, 더 깊게, 양성평등과 섹슈얼리티에 진입하고 탐구하게 만든다.




등장인물 리호, 츠바키, 치카코는 비교적 단순하게 설정된 인물이다. 리얼하게 현실을 반영하거나 사실주의적 묘사로 이뤄진 소설은 아니다. 문체는 이와 어울리게 군더더기 없이 맑으며, 투명하다. 또한 그 단순한 설정은 오히려 소설의 주제를 명확하게 만들어주고, 작가는 이 단순한 이해관계들로 그렇게도 휘몰아치며 강렬한 장면들을 창조해낸다. 독자에게 순식간에 몰아치는 흡입력과 강렬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건 작가가 책의 주소재로 '섹스'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섹스는 이 소설의 주제다. 왜 섹스인가? 우리가 양성평등에 대해 논하는데 있어서 섹스는 우리를 성별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으로 이끌어줄 가장 중요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섹스에 대한 깊은 고찰과 논의는 부족했다. 그런면에서 무라타 사야카는 이 시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려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을 놓치지 않도록 알려준 셈이다. 이 책은 섹스와 성별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주인공 리호가 성정체성을 스스로 탐구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는 "섹스가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섹스'를 찾기로 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츠바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리호를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츠바키에게 리호는 그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떼쓰는 어린아이이다. 그래서 리호에게 "넌 여자야."라고 말하며 그녀가 틀렸음을 확언한다. 개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차갑고 상식적인 말로 고정적인 성관념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츠바키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정적이고 보수적인 우리 사회의 통념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은 이 통념의 재고가 결국은 유의미하고 필연적인 일임을 보여준다. 이는 츠바키의 '목주름'이라는 상징적 요소에서 나타난다. 시간이 흘러 늙고 주름지는 것은 그저 '진리'다. 그러나 츠바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한다. 사회의 고정적인 성관념이 얼마나 나약하고 실은 너무도 형편없는 논리적 토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주는 요소다. 




그러나 희망은 역시 리호에게 있다. 리호가 욕정을 느끼는 것은 바로 츠바키의 목주름이다. 남자와도, 여자와도 섹스를 실패한 리호가 어떻게 그것에 욕정을 느끼는 걸까? 결국 리호가 원하는 것은 성별을 벗어던진, 오로지 그 육체 자체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츠바키가 지금까지 살아온 증표가 스며들어 있는, 인간의 살갗이었다." 리호는 그 '목주름'에서 성관념으로부터 벗어난 츠바키라는 인간자체를 찾아내었다. 한가닥, 의문이 풀렸다. 리호가 인간 그대로 서로 사랑하는 단순한 행위가 불가능했던 것은, 스스로도 성이라는 기호 속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혼자 깨닫는다. 이게 바로 의식의 성장이다. 




독자가 리호처럼 기존의 성관념을 타파하게끔 쉽게 이끌어주는 것은 치카코의 역할이다. 치카코라는 인물은 자신을 거대한 우주의 일부에 불과한 아주 작은 물체로 생각하는 우주적 세계관의 소유자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즉 전체에 대한 생각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어서, 그녀는 아예 인간세계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치카코에게 사회와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가 그저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인간세계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고, 현상을 지켜볼 수만 있다. 그녀가 연결되어있다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지구와 우주다. 이런 그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리호는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녀는 인간적 고통에서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간초월적인 치카코는 리호의 고민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리도 성별이란 구분에 고통스러워하는지, 그건 인간 사회에서 정해놓은 룰일 뿐인데. 하는 거다. 즉, 독자는 치카코의 관점을 통해 쉽게 "성별을 굳이 구분해야하나?"라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굳이 구분해야하나?"라는 진지한 질문을 독자의 머릿속에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위대하다는 증거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려버린다. 개인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이런 파괴적인 질문, 의문, 의아함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며 변화의 씨앗이다. 섹슈얼리티라는 바다로 출항하기 위해 독서실이란 작은 배를 골랐지만, 리호는 스스로 배에 탈 수조차 없었다. '아무도 타지 않는 노아의 방주'라고 츠바키는 말한다. 그러나 리호는 결국 스스로 자신이 갇혀있었음을 깨닫고야 만다. 그동안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세계에서 살짝 떨어져 나와, 치카코의 세계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이라고 붙들 수 있는 인물은 바로 치카코가 아닌 리호다. 치카코는 고통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즉, 아예 인간성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인간의 미래적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그에 반해 리호는, 철저히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인간이 삶속에서 경험하는 희노애락을 최대로 겪어낸다. 그리고 온전히 자기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진실한 성장을 해낸다. 이제서야, 리호는 새로운 배를 찾아 정비하고 진짜 항해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강구하는 방식을 '감각의 보고'에 의존하는 기존의 원칙을 버리고, '인식'이라는 새 방법을 찾아내어 진리를 찾아가는 '두번째 항해'를 감행한다. 리호의 '두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아무도 타지않는 노아의 방주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미래사회의 새로운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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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
존 벨레어스 지음, 공민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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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일주일에 두세번은 어머니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갔다. 내게는 항상 읽을 동화책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혼자서도 도서관에 잘 다녔다. 이 책이 대상으로하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의 아이들은 얇은 책에서 두꺼운 책을 도전해보게 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고학년 쯤 되면 도서관의 어린이 코너에서 벗어나 몇 배는 책이 많은 일반 열람실로 들어가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바로 두껍고 어려운 책에 손대보았자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빨리 어른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약간 두꺼운 재미있는 소설부터 읽어보기 시작했다. 영화로 치면 전체관람가인,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그런 책들.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도 그런 책이다.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의 나에게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었다.

 

 

 

 

 

소포를 풀자마자 나타난 처음 보는 책 표지에 나는 탄성을 질렀다. 윽.. 너무 예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그림과 디자인들은 어째 성인이 되어 더욱 끌리는 것같다. 하여튼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얼른 책을 펼쳤다.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는 미국의 호러 판타지 작가 존 벨레어스의 대표작이다. 1973년 출간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오래 전 만들어진 책이지만 이 책은 여전히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책의 배경은 고딕풍의 신비롭고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며, 화려하고 재치있는 마법들로 가득하다. 책의 주인공 루이스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이 멋진 세상을 좋아한다. 나도 책을 읽는 동안은 어린 루이스와 함께 환상적인 마법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여린 루이스는 그 나이대에 겪기는 벅차보이는 슬픈 상황에 처하지만, 따뜻한 삼촌과 짐머만 부인을 만나 새로운 안식처를 얻는다. 든든한 두 사람을 뒤에 두고서 루이스는 성장한다.




책이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요소는 루이스가 난관을 겪고, 성장하는 부분에서다. 난관에 처했을때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건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 어린 루이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소중한 삼촌과 짐머만 부인을 위해서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행동한다. 툭하면 울고 겁내는 루이스가 무시무시한 마법사 이자드 부인과 정면대결한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커다란 위협에 맞서는 주인공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 루이스처럼 그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쭉 펼쳐진 미로같은 삶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상처입고,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면에서 여전히 어린아이를 내면에 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과 소통하고, 어린이 문학에서 배울 점을 찾도록 해준다. 쌀쌀한 이번 겨울,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스산하며 화려한 마법 세계에 함께 빠져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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