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 전환기에 퍼트니힐을 방문했던 손님 중의 한 사람은 그 두 늙은 남자가 마치 레이던산 병에 든 두마리의 기이한 벌레들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그 사람은 스윈번을 볼 때마다 잿빛 누에나방(Bombyx mori)을 떠올렸는데, 스윈번이 자신 앞에 놓인 음식을 한조각 한조각 먹어치우는 모습도 그러했거니와, 점심시간 뒤 그를 덮친 몽롱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전기가 번쩍 지나간 듯 새롭고 활기찬 상태로 깨어나더니 내쫓긴 나방처럼 손을 떨면서 서재를 재빨리 왔다갔다하다가 계단과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런저런 귀한 책을 책장에서 꺼내는 모습 또한 나방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 P195
나보코프의 취미는 나비 채집이었다고 한다. 스쳐가 듯 등장하는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읽는 여자. 단편들을 통과하는 나비를 잡는 남자. 나비를 잡는 러시아 소년.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다 러시아를 떠나 영어로 소설을 쓴 작가. 독일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박살난 아름다움.
파울은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우리는 항상 20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가, 한시간이, 한번의 맥박이 지나갈수록 모든 것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고, 아무런 특색도 없는 추상적인 것들로 변해갔다. - P72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185
모라비아의 친구 파졸리니는 1950년에 이 소설을 읽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18년 뒤 파졸리니는 <테오레마>에서 하녀를 땅에 깊이 파묻었고, 아버지를 광야에 유배 보냈다. 전후 당시에는 파시즘이 하나씩 뿌리채 뽑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