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메다 남자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2
스와 데쓰시 지음, 양윤옥 옮김 / 들녘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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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 "체리파하", "타퐁튜"

왜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단어들을 굳이 사람들에게 말하려 했을까?

누가 알아 듣기를 바라지 않으며,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사람. 우리는 그를 비정상이라 볼 것이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라 했다. 그런 명제로 보자면 그는 분명 비정상이다.

언어란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나를 표현하여 듣는 이가 이해하길 바라는 서로간의 교류이다.

또한 인간은 무리 속에 섞이길 바란다. 그 무리와 같은 언어로 소통하며 소속되길 바란다. 외톨이가 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만의 세계를 만들고 오히려 세상을 따돌렸다.

이야기는 화자인 '나'가 숙부와 숙모의 일기장을 발견하며, 독특했던 숙부를 소설로 옮기는 과정의 기록이다.

어려서 말을 더듬었던 숙부는 어느날 갑자기 더이상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 있던 말더듬이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언어가 갖는 법칙이 그를 옭아매고 가둬버리는 것처럼 그는 불편해했다.

그래서, 그 반동으로 언어적인 회의에 빠지고 통념적인 것의 이면을 끊임없이 파헤치는 반골정신을 으뜸으로 삼으며

<안드로메다 남자>로 거듭 난 것이다.

 

그렇다면 안드로메다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가 말하려는 '안드로메다'는 비정상도, 특이함도 아닌 그저 세계의 바깥쪽,

저 안드로메다 방향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회에 무언가를 끼치려는 것이 아닌 그저 어딘가 무중력의 장소에서 한숨 쉬어가기를

바라는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숙부는 숙모의 죽음 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가 <안드로메다>로 간 것은 아닐까? 

 
화자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일기를 인용하며 보여주고있다. 소설이 체 완성되기 전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어딘가 모순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특징이다. 아직 소설이 되지 않은 소설. 독특하다 할 수 있지만, 정리 되지 않는 생소함은 남는다.

누구에게나 안드로메다를 향하고픈 열망이 있지 않을까? 혼자 남겨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이한 행동을 하던 [튤립 남자]처럼 바깥쪽 어딘가를 향해 나만의 표현으로 현실의 무게를 잊고 무중력 상태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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