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산다는 것 - 학교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이계삼 해제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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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유령, 학교 괴담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담론 가운데 하나는 학교 괴담이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 중에 아무렇게나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교사가 앞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상관하지 않고 제 볼일을 본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와 떠들고 쉴 새 없이 스마트폰으로 교신을 한다. 그 소란의 와중에서 끝도 없이 잠을 자는 아이들도 상당수 된다.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도 불사한다. 소소한 시비 끝에는 경찰에 신고를 해서 학교에는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고 있다. 따돌림과 폭행이 일상화되어 있다. 심지어... 많은 학교들에는 일진이 살고 있다!

이 아수라장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되어 중학교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친 중2’라는 말도 생겨났다. 오죽하면 북한이 남한에 쳐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중딩이 무서워서라는 우스개 소리가 등장했겠는가.

학교 괴담을 접하게 되면 세상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학교와 교육, 청소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절로 토해내게 된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장탄식을 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하나 같이 묻는다. 그 학교는 괜찮으냐고, 학생들이 무섭지 않으냐고, 남자고등학생들은 덩치도 크고 더 무서울 텐데,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냐고. 염려해주는 지인들을 위해 이 자리를 빌려 답하자면, 나는 괜찮다. 학생들이 무섭지는 않다. 남자고등학생들은 정말 덩치가 크지만(진짜 커졌다!) 그래도 무슨 일을 당하지도 않았다. 교사인 나도, 학생들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잘 살고 있다고는 절대 말 못하겠지만, 내가 매일 매일 전장으로 출근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왜 지금 학교 괴담인가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얘기들이 대부분 사실이 근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담론이 한 사회 전체를 휩쓸고 있다면 일단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너무 많은 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뒤에는 수상한 의도가 버티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학교 괴담이 형성되고 들불처럼 빠르게 한국 사회에 번져 나가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획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많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인가?

하필 지금인 까닭을 여러 경로로 추정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가장 주되게 학생 인권 조례와의 관련성을 의심 중이다. 학생 인권 조례가 제정되자, 많은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망나니 같은 아이들에게, 안 그래도 미쳐 날뛰는 저 아이들에게 인권 따위를 보장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두드려 패서 가르쳐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저것들에게 인권을 허()한다고?

이미 시의회를 통과한 학생 인권 조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명확하다. 학생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만한 자격을 애초에 상실한 존재임을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 폭력이 전 사회의 관심사로 부각되는 동안, “그러니, 보라! 폭력과 욕설, 무질서가 난무하는 학교를.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인권이 아니라 교육을 말해야 한다.”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학교에 대한 뭇 사람들의 염려 덕분에 우리는 등교 시간에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는 학교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가고, 이런 저런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수시로 복도에서 대면한다. 경찰이 지켜주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전보다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을까? ‘폭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빈사상태의 학교를 살리는 좋은 처방이 될 수 있을까?

 

학교에 부족한 것은 교육이다

지금 학교에 부족한 것은 폭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아니라 교육이다. 학교 괴담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사실은 교육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학교에 교육이 부족하다고? 맞다. 학교에는 교육인 척 하는 것은 많지만 교육은 턱 없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 그리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일을 담당하는 학교에는 교육이 아니면서 교육인 척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교육인척 하는 것들의 위장은 하도 교묘해서, 제대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때,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이 생각났다.

조너선 코졸은 미국의 차별적인 교육과 사회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교육자이다. 인종분리가 가장 심한 지역의 흑인 거주 구역의 학교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한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를 읽어줬다는 이유로 해고된 뒤 가난한 사람과 유색 인종에 대해 차별적인 미국 교육의 문제를 고발하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정말 한 평생을 진정한 교육무엇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하나이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세심한 문제제기를 통해 우리가 교육이라고 믿어 온 것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코졸이 <교사로 산다는 것>에서 첫 번째로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은 학교이다.

학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많은 이들이 개탄을 하지만, 여전히 학교는 힘이 세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좋은 일을 정도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많은 교사들이 말썽을 일으켜서 불려 온 아이들에게 학교를 계속 다닐 의사가 있는가를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하는 학생을 나는 여태 만난 적이 없다. 학교가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아 보이는 아이도, 학교를 개똥보다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몰래 말이라도 맞춘 듯 학교는 졸업해야지요, 하고 답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통의 평범한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부모에게 학교가 행사하는 힘이야 여전히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코졸은 이렇게 말한다.

 

공립학교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립학교 체제가 갖은 수를 써가며 우리에게 망각시키려 하는 사실, 즉 공립학교가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공립학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공립학교는 총명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보통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립학교를 재건하거나 재창안하거나 해체하거나 대체하는 일은 신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23)

 

문화의 힘은 놀라운 것이어서 한 세기 전이라면 매우 기이한 일로 간주되었을 많은 현상들을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당연한 것,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근대 이후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외면한 채,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질병 치료 행위가 제도 속으로 포섭되면서, 백 년 전이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온갖 민간 처방들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의사 자격을 만들어 규격에 맞지 않는 자의 치료는 그가 진짜로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불법화한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을 믿는데도 의사의 보증을 필요로 한다. 해마다 건강진단을 받으며 그 결과에 노심초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제 건강도 질병도 우리의 손을 떠나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교육 역시 산업화의 강력한 동력에 의해 급속히 기계화된 대량 생산의 길을 걷게 된다. 규격에 맞는 전문가들이 제도적으로 인정된 기관에서 가르치는 것을 규격대로 배워야만 이 사회는 그의 배움을 인정한다. 백 년 전이면 자연스러웠던 삶과 교육의 결합은 근대적인 형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격된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만약 교육이 삶과 분리되었다면 그것은 교육인 척 하는 것이지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만나기

코졸은 삶과 분리시킨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의 현장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그가 포착해낸 장면 가운데 유난히 내 가슴을 치는 것이 있다. 교사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나는이라는 일인칭의 표현을 쓰지 않고 선생님은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보편적 존재가 아니면서 보편성을 위장하는 것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자연인으로서 너희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보편적인 존재로 너희들 앞에 서 있는 거야. 너희들보다 우월할 뿐 아니라 오류도 없지. 그러니 내가 가르치는 것을 보편적인 진리로 믿으란 말이야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나를 넘어선 보편적인 무엇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헛된 위장으로 행해진 수업은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교사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인식하거나 옆에 있는 누군가를 3인칭 취급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의 전 생애를 만나는 일이다. 내가 만나는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일이다. 만남이 갖고 있는 그 엄중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적대시함으로써 거의 존재를 짓밟는 행위를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학교에 폭력이 만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를, 또 다른 사람을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거대 산업체의 복잡한 기계 버튼을 누르거나 외국인 민간인 마을에 폭탄과 네이팜탄 발사 버튼을 누르는 완벽한 일꾼이 될 것이다.”(26)

 

코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위장하지 않은 일인칭의 열린 자세로 말하고 존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며 아이들의 눈앞에서 일인칭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일인칭으로 학생들 앞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분노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이며, 때로는 틀리고 때로는 실수하는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진공 속의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에 얽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일인칭으로 학생들은 대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우리 학생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울고 숨 쉬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투쟁할 능력과 권리가 있음을 가르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를 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말하게 될 것이다.”(30-31)

 

문제는, 이렇게 할 때 내가 가르치는 것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인칭의 내가 가르치는 것은 3인칭의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힘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말했기 때문에(혹은 교과서가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것이며, 그것을 학생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코졸은 말한다. 그가 아는 한 고뇌의 시대에 불의와 혼란이 만연한 땅에서 진지한 교사가 택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은 이것 뿐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즘 학생들의 삶이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고 염려한다. 하지만 그 폭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폭력을 휘두른 아이들은 말한다.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자고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그것을 우정이라 말한다. 우리는? 학생들의 삶을 짓밟으며 그걸 교육이라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을 복제하며 자란다.

진짜 괴담은 여기에 있다. 교육이 아니면서 교육인 척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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