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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 세이브
이진서 지음 / 피톤치드 / 2018년 10월
평점 :
#01. Intro
모든 글에는 작가의 숨이 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감추고 쓰는 글을 제외하면 글에는 작가가 가진 생각과 경험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허구로 지어내 쓰는게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와 소설이 완전히 별개인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의 생각과 말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자신을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이 드러내냐이다. 이 정도의 차이에 따라 작가는 작품 속 방관자가 되기도 하고 주인공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02. 블론 세이브
이 책은 평범한 대한민국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진서'라는 사람의 단편집이다. 담임에게 촌지를 주어야 좋은 대학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던 고등학교생활, 여자 많이 사귀기가 인생의 전부인 청년, 작가를 꿈꾸며 온갖 공모전에 도전하는 30대, 직원들에게 권고사직을 내려야 할 임무를 떠맡은 과장 등. 10대부터 50대 정도까지 나름 다양한 이야기가 실렸다. 이야기들이 어떤 특별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갑갑하고 무거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현실을 비틀어 위트를 담아 재미있게 그려낸다. 대부분의 중년이 가정을 위해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듯, 자조적으로 끝난다. 분명 작가가 의도한 부분일거라 생각한다.
읽다보면 이야기들 속에 반복해서 나오는 소재나 표현들이 있다. 야구, 낚시, 여자, 회사, 글쓰기 등. 이걸 보고 이야기 속 모든 주인공은 작가라는 걸 깨달았다. 책날개에서 말하는 '세상을 향해 날리는 중년 아재들의 변명'은 작가가 날리는 자조적인 변명이었다.
#03. 작가와 소설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글을 쓸수록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때문에 처음 글을 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자신만큼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이 어디있겠는가. 자신을 글에 투영시키기도 하고, 글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자신을 글에 녹여낸 뒤엔 '자신'의 밖으로 넘어간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그리고 감정을 이입시켜 자신이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타인'을 작품 속에 창조해낸다. 이 과정을 넘지 못하면 인물, 사건, 배경만 바꾼채로 똑같이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자기복제를 반복할 뿐이다.
#04. 총평
소재가 작가 자신의 삶에 한정되어 이야기들이 전부 비슷한 느낌을 주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작가가 책말미에 '이 책은 나의 기억의 장례식'이라며 그 점을 인정하고 거기에 만족한다고 밝혔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다.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이었다.
문장 : ★★★☆☆ - 간결하고 찰진 비유
소재 : ★★☆☆☆ - 소재 자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플롯 : ★★★★☆ - 평범한 소재를 조금씩 꼬아 흡입력 있게 풀어냄
[p.32]
당구장 안의 자욱한 담배 연기와 아직 가시지 않은 바깥의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섞여 눈과 코가 심히 불편했다. 이 불편한 공기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지금의 이 당구처럼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날 따라 유독 더 심한 무기력감이 밀물처럼 내게 밀려왔다.
[p.67]
심사위원은 낙선자에게 왜 낙선했는지 일일이 말해주지 않는다. 내 작품이 뭔가 부족해서려니 하며 낙선 사유를 만들어야 낙선했따는 사실을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여름 한 철, 밀린 숙제하듯 단숨에 쓰고 밀어 넣은 공모전에 작은 상이지만, 몇몇 공모전 수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에 그래도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수상자 명단에 오른 이상, 메달의 색을 가늠하는 건 단지 운의 영역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215]
'경험은 우려먹으면 끝장나는 것이라 오래 가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적 자극을 통해 경험을 인식으로 심화시키지 못하면 소설의 바탕이 한없이 일천해진다.
살아온 경험에 의해 나는 이 소설집 한 권을 우려먹었으니 이제 끝이다. 박상우 님 말씀처럼 '지적 자극을 통해 경험을 인식으로 심화시키지 못했으니' 내 소설은 더더군나다 여기서 끝이다. 경험을 인식으로 심화시키면 그것이 곧 문학이다. 내 소설은 잡기일 뿐, 결코 문학은 아니다. 하지만, 내 소설의 생명이 여기서 끝나도 나는 아쉽지기 않다. 젊은 날 힘들었던 그 기억을 이렇게 기록물로 남겼으니, 이 책 출간으로 그 기억의 장례씩을 치른 것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힘든 과거를 접고 나는 이제 그 아픈 기억들을 떠나보냈다. 나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
: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