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문성희의 밥과 숨
문성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성희의 밥과 숨 : 슬로우 라이프를 꿈꾸다.

    

*무엇이 필요한가? 숨 쉬는 것 외에, 배고픔을 면하는 것 외에, 살아있음을 감지하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P.21)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고 그리고 밥을 먹는 것. 또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저자에게 나는 할 말이 많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 25, 욕심 많은 나에겐 삶이란 아직 복잡하고 어렵다. 세월이 흘러 내가 저자의 나이가 된다면 나도 절제하고 단순해지는 일상을 꿈꾸고 있을까.

 

책을 읽은 후, 저자가 슬로푸드 한국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슬로우 푸드는 공정한 재배과정을 시작으로 깨끗한 재료와 올바른 식사를 지향하는 건강한 삶을 꿈꾼다. 그 철학과 함께하는 이 책은 슬로푸드의 주최로 북콘서트도 진행하였다.

 

사실 나는 작년 교내에서 진행하는 해외학술탐방의 참가 주제로 '슬로우푸드'를 선택했다. 자취와 기숙사생활을 하던 나의 식생활은 학교 주변 값싼 음식과 인스탄트 식품이 중심이었다. 그렇지만 한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슬로푸드 한국협회 관계자분 그리고 청년대표님과 인터뷰도 진행하고 많은 자료들을 공부하며 준비하였다. 최종 합격 후 유럽으로 건너가 시장조사와 거리 인터뷰, 슬로푸드 독일 청년대표와 인터뷰 등 건강한 식문화에 대한 현지탐방을 진행했다.

 

하지만 비행기 연착과 숙소에서 생긴 문제는 슬로푸드 본부로 가는 기차를 놓쳤고 예상치 못한 지출로 식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를 맥도날드 햄버거로 때웠다. 슬로푸드 운동의 시작이 맥도날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외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며 한 여름 유럽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숨 쉬는 것도,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 먹는 것도 버거웠다. 꿈꿔왔던 상상의 나라 유럽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괄목할만한 결과는 없었고 슬로푸드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문성희의 밥과 숨'을 통해 다시 그 철학을 만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먹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잠자리에 드는 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오늘을 잘 마무리하면 내일이 쉬워질 것이고, 새벽의 시간을 잘 맞이하면 하루의 기둥이 바로 선다. (P.35)

 

*밥상이 단순하고 소박해져야 한다. 그러면 몸이 건강해지고 덧없는 욕구가 줄어들어 삶에 대한 만족감이 커진다. (P.56)

 

요리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저자는, 조리사 시험을 위한 강습을 시작으로 화려한 요리의 권위자로 성장한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에 억지로 몸을 넣는 허탈함이 커지며 모든 것을 버리고 도시를 떠난다. 어린 딸과 산 속에 둥지를 트고 장작을 패고 식재료를 다듬으며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굳혀간다. 하지만 자연과 함께한 당시의 생활은 딸에게는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저자의 방황 아래서 딸이 겪었을 고통의 시간이 어떨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나였다면 과연 견딜 수 있었을지 확신은 없다.하지만 그 시간은 저자와 딸 모두에게 삶을 지탱할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소박한 밥상을 차리며 찾은 안정으로 자신의 옷도 직접 만들기 시작한다. 자연속에서 이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았다. 마침내 요리하는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요리와 함께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자연요리라는 것은 사실 내게는 어렵다. 저자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으로 터득한 굳은 심지를 내가 안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다. 수수한 음식보다 다채롭고 호화로운 음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나의 전공은 식품의 효과적인 가공 기술과 대량 생산을 배운다. 자연요리와는 정확하게 정 반대의 방향에 서있다.

 

자연요리의 맛이 어떠한지 문자로는 배웠지만 몸에 와닿지는 않는다. 저자와 딸은 '시옷'이라는 공간에서 자연을 요리한다. 금요일 하루 점심에만 예약으로 그 밥상을 맛 볼 수 있는데 꼭 한번 가봐야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찰나를 지나는 과정일 뿐이다.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느낌을 갖는가는 각자의 선택이다. 나의 느낌과 생각은 나 스스로의 결정에 달려 있다. (P.154)

 

히말라야의 고산지대를 오르고 인도의 명상학교에서 수행을 거치며 생각을 정리하고 삶을 단순하게 비워간다. 새벽 명상과 절제하는 식습관으로 일상의 법칙을 지키기도 하고 다시 또 어겨보며 계속해서 자신의 실험을 진행한다. 많은 경험과 인연을 쌓은 저자는 이제 여행에도 모임에도 미련이 없다. 삶을 채워가는 단계에 서있는 나에겐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같지만 현재 저자가 고민하는 월다잉(well-dying)은 결국 나에게도 주어진 숙제이다.

 

이렇듯 책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지 않는다. 음식은 나의 몸으로 들어와 내가 된다. 무엇이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끊임없는 성찰에 달렸다. 결국 내가 먹는 음식이 바로 나임을 알고, 소박한 재료가 만드는 건강함에 저자는 남은 삶을 걸었다.

 

*어떠한 상황도 변화될 수 밖에 없으며, 어떠한 상처도 아물 수 밖에 없다.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P.171)

 

저자의 첫번째 결혼생활은 짧았다. 스무살부터 함께한 남자친구이자 남편은 스물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세월과 함께 외할머니와 이모님, 어머님은 차례로 저자의 곁을 떠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는 두려움에 숨이 탁 막혔다. 언젠가는 나에게 벌어질 순간일 것이다. 꼭 죽음과 이별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기쁨보단 더 자잘한 절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래도 그 순간순간 나를 잃지 않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응원한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 위해 애쓰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밝아졌고 행복했다. 이처럼 요가의 길은 쉽고 단순했다. (P.195)

 

저자는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한 뒤에 깨달았다.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사실 나도 한달 전부터 매일매일 요가학원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아직은 잡생각도 많고 몸도 뻣뻣해서 힘이 든다. 약간의 즐거움과 이미 낸 수강료가 지속의 이유다. 곧 나 자신에게 진정으로 집중하는 시간이 되어 내 삶에 좋은 영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내게 애쓰지 말라는 말은, 지금 무엇이든 더 해야한다는 불안함으로 떠도는 나를 잠재울 수는 없다. 당장 마음을 비우고 소박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더라도, 현재의 내 존재를 인정하고 더 사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순간의 나에게 집중하고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고 싶다.

  

이어서 한번 쯤 도전해볼만한 저자의 10가지 죽 요리와 저자의 딸의 혼밥요리 10가지가 나온다.

정갈한 사진과 덧붙인 글들은 책을 보는 것 만으로도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 책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 사람의 요리인생이 담겨져있다. 건강한 몸과 소박한 마음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음식에 대한 철학이 있다. 누구나 먹는 음식이기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정갈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빵 고양이의 비밀
최봉수 지음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빵 고양이의 비밀 : 식빵 뚱냥이와 즐기는 티타임

    

김영사의 문학 브랜드 비채에서

'고양이식당'와 함께 '식빵 고양이의 비밀' 을 출간했다. 한 권만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드니 두 권 모두 봐야지.

    

 

식빵 고양이의 비밀

식빵 공장의 뚱냥이들은 뚱뚱하지만 착실하고 부지런하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식빵을 만들면서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발효를 기다리며 낮잠을 자고, 쉬는 시간에는 산책을 즐기면서 '슬로우라이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책이 말하는 '식빵 고양이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그림책이다. 비밀은 바로 식빵에서 고양이가 탄생한다는 점! 글로만 읽으면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을 통해 작가의 상상력을 바라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양이 티타임

두번째 이야기인 고양이 티타임.

작가는 뚱냥이들의 티타임에 대한 유래와 규칙을 알려준다. 푸근한 뚱냥이들과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은 실루엣부터 색감까지 눈길 한번으로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쉽다. 샌드위치안에는 어떤 재료가 숨어있을지, 케이크에 쓰인 크림은 어떤 맛일지 찬찬히 살펴보며 한입 한입 음미하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뚱냥이들의 꽤나 엄격한 티타임 규칙을 익히며 나도 혹시 초대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책을 통해 작가가 그린 뚱냥이 세상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초 단위로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뚱냥이 세상은 아마도 이단으로 취급될 것 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처음 배우는 단어 중에 '빨리빨리'가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성격 급한 한국인이지만, 그래도 한번쯤 뚱냥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 일하고 쉬고 먹고 자고, 자기 할일 다하며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뚱냥이들의 마인드를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느긋한 기분을 느끼는 건 일상에서 쉽지 않다. 이 책을 보는 순간에는 뚱냥이들과 함께 나도 덩달아 잠시나마 느려진다. 둥글둥글 웃고 있는 고양이의 반달 눈매를 보고 있으면 내 입가에도 반달이 뜬다.

    

초판 인쇄본에는 스티커가 부록으로 들어있다.

    

제목만 보고도 식빵이 먹고 싶어져서 구매한 식빵들. 향긋한 식빵 냄새를 맡으니 금방이라도 고양이가 나타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식당
최봉수 지음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양이 식당 : 미식가 뚱냥이들의 이야기

 

    

김영사의 문학브랜드 '비채'에서

뚱냥이들의 이야기가 그림책으로 출간했다.

뚱냥이 그림으로 유명한 최봉수작가님의 첫 그림책으로, 3일만에 텀블럭 크라우드 펀딩을 완판시킨 기대작이다.

 

    

*고양이 식당

이곳엔 온통 뚱냥이들 뿐이다. 뚱냥이 손님을 맞이하는 뚱냥이 웨이터 그리고 음식을 요리하는 뚱냥이 셰프까지! 책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뚱냥이들의 평화롭고 느긋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딱 한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내가 느끼기엔 그는 악역이다. 인간이 여길 왜 끼는거야!하면서 성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먹음직스러우면서도 음식의 특징을 부드럽게 표현한 그림들은 한번보고 지나치기 아깝다.

나는 평소에도 음식 사진과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계속 보고 또 보며 감탄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대회

고양이 마을에도 크리스마스가 찾아온다. 모두가 열심히 케이크를 만드는 대회에서 벌어지는 해프닝.

 

결말을 말하자면 모두가 맛있게 케이크를 먹으며 마무리 된다. 누가 1등을 할것인지 궁금해하던 내 자신이 웃겨서 실소를 터뜨렸다. 앞서 보았던 고양이 식당에서의 느긋함과 여유가 이어진다. 그들에게 경쟁과 결과는 재미가 없다.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그러한 일상이 전부다.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접하는 건 매우 오랜만이다. 나의 일상에서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은 그림들을 접하고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종이에 인쇄되어 묶어진 책은 그 느낌이 다르다. 더 자세히, 오래 보게 되고 또 다시 보게 된다.

 

책 속에는 글이 매우 적다. 때문에 한번에 글을 읽고 그림을 쓱 보고 넘기면 책장을 휙휙 넘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좀 더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뚱냥이는 이런 음식을 먹는구나, 이 음식은 이렇게 생겼구나, 이건 무슨 맛일까? 하면서 나도 덩달아 느려진다. 바쁜 현실과 다른 고양이들의 판타지속에서 한 템포 쉬어가는 기분이 든다.

    

표지는 두껍고 푹신푹신하다.

    

초판인쇄의 특별부록으로 스티커가 들어있다. 어디에다가 붙일지 고민되지만 아마 쓰기 아까워서 그냥 소장해야 겠다.

    

뚱냥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고있으면 덩달아 입이 심심해진다. 집에 있는 초콜릿을 꺼내 먹으면서 다시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컬러 인문학 - 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
개빈 에번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컬러 인문학 : 색으로 바라보는 세계의 역사

    

빨간날, 블루칩, 노란리본, 핑크머니 등에서 색깔은 많은 뜻을 한 단어로 함축한다. '컬러인문학'을 통해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색깔을 기반으로 그 상징적인 의미와 시각적 형상화를 바라볼 수 있다.

 

두꺼운 표지와 B5정도의 큼지막한 책 속에는 이해를 돕는 150컷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다. 또한 책을 꽉 채우지 않는 넉넉한 여백과 두께감 있는 페이지는 마치 가벼운 교양 잡지를 보는 듯 하다.

    

책의 순서는 11개의 색깔로 나누어져 있다. Orange(주황색)처럼 과일에서 따온 색, 분홍색과 같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 등 색의 유래와 역사들을 차례로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 순서인 '빨강'은 고대의 동굴벽화로 시작한다. 빨강은 10만년 전 부터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모든 문화권이 공유하는 최초의 색이다. 인간의 피의 색깔이자 탄생, 죽음, 생식력을 나타낸 다는 점은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년행사는 '빨간색의 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온 도시와 상품들에 붉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활력과 정력, 기쁨과 축하의 의미까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빨간색의 존재는 매우 크다. 실제로 중국시장에서 어마어마한 매출을 자랑하는 오리온의 초코파이는,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컬러마케팅 사례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빨간색은 성적인 어필, 혁명의 전투적 의미, 귀족들만의 색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용해왔다. 이를 보면 색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라는 것이 실제 존재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같은 색을 가지고도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전혀 다른 도구로써 이용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파랑은 남자의 색으로 불린다. 하지만 1897년 뉴욕타임즈는 분홍은 남자아이의 색,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임을 강조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분홍색은 강렬한 빨간색에서 나온 연한 빨강으로, 당연히 소년의 색이라고 여겼다. 얌전하고 섬세한 여자아이들에겐 파랑이 어울린다고 덧붙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카톨릭 국가가 그리는 성모마리아는 항상 파란색 망토를 입었다. 때문에 당시 파랑은 여성스러운 색을 의미했다.

 

하지만 현재 분홍은 여성의 색으로 사용한다. 여자아이를 타겟으로 하는 인형, 공책, 연필, 가방 등은 모두 분홍색이며 남자아이들의 물건은 파란색이었다. 현재는 이러한 고정관념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커지긴 했지만 커다란 변화는 없다.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여자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화장품 업계에서도 제품은 물론 브랜드 전체 메인 색을 분홍색으로 사용하는 업체도 적지 않다. 나 역시도 분홍색 제품에는 한번 더 눈길이 가고 실제 구매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인이 색 선호도가 바뀐다. 이는 결국 성향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에 의해 학습된 것에 가까움을 의미한다.

 

내가 중학생 때 매우 사랑했던 아이돌가수의 대표색은 빨간색이었다. 자연스럽게 안경부터 옷 그리고 모든 학용품을 고르는 나의 첫번째 기준은 빨간색이 되었다. 당시 빨간색에 대한 애정은 나의 팬심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며 특별한 의미를 가졌었다. 이처럼 색깔을 사용한다는 것은 가벼운 표현방식이 아니다. 색 자체에 대한 선호보다는 그 색에 녹아있는 어떤 특정한 의의에 동의하는 것이 아닐까.

 

이밖에도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시기에서 색을 얻기 위한 과정을 바라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함축시키는 최적의 색을 찾고, 이를 활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할 것이다.

 

'컬러인문학'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웠다. 인문학의 갈증이 나는, 그렇지만 어려운 책은 부담스러운 나같은 사람에게도 가볍게 다가오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땅의 예찬 : 인내하고 사랑하는 정원일기

    

 

일주일 전,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텃밭에 딸기를 심는 봉사 활동을 하였다. 얼마 만에 흙을 만져본 것이었을까.

 

하지만 일일 선생님으로서 능숙한 척을 하느라 정작 땅과의 재회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땅의 예찬>을 읽기 시작했다.

 

정원 일은 내게는 고요한 명상, 고요함 속에 머무는 일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멈추어 향기를 풍기게 해주었다.(P.8)

 

한병철 저자는 베를린 예술대학의 교수이자 <피로사회>, <헤겔과 권력> 등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사회를 비평해왔다. 이제 그는 정원사가 되어 냉혹하고 매서운 베를린의 겨울 속에서 정원일기의 막을 올린다.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화원을 꿈꾸며 그의 정원에 세 번의 사계절이 흘러간다.

 

정원에서의 초침은 정지된 듯 천천히 움직인다. 땅을 느끼고, 가꾸고, 기다린다.

인내의 과정은 쉽지 않지만 그것만이 답이다. 온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더 나아가 애인을 대하듯 꽃과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P.32)

 

현대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 발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더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대인들은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일상적인 수치화 탓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요소와 정보들이 숫자로 표현되어 가치가 매겨진다. 이는 곧 비교로 이어진다. 더 높은 숫자를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간다. 원하는 점수에 도달하더라도 더 큰 점수를 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경쟁과 비교는 행복을 향한 계단의 개수를 늘린다. 수치화할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행복과 멀어진다.

 

대학생인 나에게도 이러한 상황은 익숙하다. 학점, 자격증 개수, 토익 점수, 인턴 등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높은 숫자로 이력서를 채워야 한다. 이런 내게 땅으로 가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저자는 나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땅을 통해서 얻어낸 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저자의 고뇌와 기쁨의 기록이다. 땅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의 소중함을 애정으로 노래하며 다른 이들도 알았으면 하는 제안을 건넨다. 가만히 앉아 땅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들어보며 나의 일상에도 잔잔한 풀 냄새가 풍겨오기를.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봄이면 새로운 생명이 깨어난다. 죽은 등걸에서 다시 싱싱한 초록이 솟아난다. 이런 경이로운 기적이 어째서 인간에게는 거부되어 있을까, 하고 나는 자문한다. (P.66)

 

올해는 붉은색 크리스마스로즈가 핀다. 작년에는 꽃이 피지 않더니만. 분명 그동안 쉬면서 힘을 모았던 게다. (P.132)

 

추운 겨울에도 서리를 맞으며 꽃이 피어난다. 당장은 꽃이 피지 않았어도 이듬해 활짝 핀 얼굴을 자랑하기도 한다. 현재 나는 어느 시기에 머물러 있을까. 아마도 더 활짝 피고 싶어서 비료를 준비하고, 햇빛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기인 것 같다.

 

내가 요새 습관처럼 쓰는 '조급해지지 말자'라는 문장 뒤에는 불안한 조급함이 숨어 있다. 어느 순간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좀 더 많고 빠른 성과만을 원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휴학을 하였다. 잠깐 멈추어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커다란 바램과 함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쉽게 지울 수는 없다. 그래도 한 번에 피우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지 하며 묵묵히 인내하는 법을, 꽃을 통해 배운다.

 

몹시 추운 밤. 늦서리에도 불구하고 내 정원에서는 거의 기적처럼 그 어떤 식물도, 꽃도 얼어 죽지 않았다. 내 사랑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거든. 사랑은 온기, 그렇다, 마음의 온기, 가장 차가운 서리에도 꿋꿋이 맞설 수 있게 해주는. (P.136)

 

정원을 향한 저자의 사랑은 간절하고 애틋하다. 여름의 끝을 두려워하지만 겨울은 다가온다. 그리고는 무섭도록 추운 화원의 겨울밤을 사랑으로 채운다. 하지만 그 애절함에도 영원한 생명은 없다. 가을이 지나가면 많은 꽃이 시들고 낙엽으로 떨어진다. 설치류의 공격으로 애지중지하던 버드나무의 생이 종결되었다. 저자는 피 흘리는 기분으로 울부짖지만 막을 수는 없다. 그저 떠나보내고 다른 겨울 꽃들을 맞이해야 한다. 절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정원을 향한 예찬은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나의 정원.

 

 

이 책에는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초반에는 사실 꽃의 이름을 억지로 외우다 보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후에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저자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접근하였다. 두껍지 않은 분량과 중간중간 꽃의 삽화가 여유로운 독서를 도와준다.

   

꽃들은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 그리고 그 꽃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가꿔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잘 산다, 저렇게 하지 마라 가 아닌 그저 정원의 일상을 보여주며 우리 삶의 피로를 달래주는 책이다. 천천히 음미하는 휴식의 독서로 제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