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예찬 : 인내하고 사랑하는 정원일기

일주일 전,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텃밭에 딸기를 심는 봉사 활동을 하였다. 얼마 만에 흙을 만져본 것이었을까.
하지만 일일 선생님으로서 능숙한 척을 하느라 정작 땅과의 재회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땅의 예찬>을 읽기 시작했다.
『정원 일은 내게는 고요한 명상, 고요함 속에 머무는 일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멈추어 향기를 풍기게 해주었다.(P.8)』
한병철 저자는 베를린 예술대학의 교수이자 <피로사회>, <헤겔과 권력> 등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사회를 비평해왔다. 이제 그는 정원사가 되어 냉혹하고 매서운 베를린의 겨울 속에서 정원일기의 막을 올린다.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화원을 꿈꾸며 그의 정원에 세 번의 사계절이 흘러간다.
정원에서의 초침은 정지된 듯 천천히 움직인다. 땅을 느끼고, 가꾸고, 기다린다.
인내의 과정은 쉽지 않지만 그것만이 답이다. 온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더 나아가 애인을 대하듯 꽃과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P.32)』
현대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 발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더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대인들은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일상적인 수치화 탓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요소와 정보들이 숫자로 표현되어 가치가 매겨진다. 이는 곧 비교로 이어진다. 더 높은 숫자를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간다. 원하는 점수에 도달하더라도 더 큰 점수를 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경쟁과 비교는 행복을 향한 계단의 개수를 늘린다. 수치화할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행복과 멀어진다.
대학생인 나에게도 이러한 상황은 익숙하다. 학점, 자격증 개수, 토익 점수, 인턴 등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높은 숫자로 이력서를 채워야 한다. 이런 내게 땅으로 가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저자는 나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땅을 통해서 얻어낸 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저자의 고뇌와 기쁨의 기록이다. 땅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의 소중함을 애정으로 노래하며 다른 이들도 알았으면 하는 제안을 건넨다. 가만히 앉아 땅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들어보며 나의 일상에도 잔잔한 풀 냄새가 풍겨오기를.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봄이면 새로운 생명이 깨어난다. 죽은 등걸에서 다시 싱싱한 초록이 솟아난다. 이런 경이로운 기적이 어째서 인간에게는 거부되어 있을까, 하고 나는 자문한다. (P.66)』
『올해는 붉은색 크리스마스로즈가 핀다. 작년에는 꽃이 피지 않더니만. 분명 그동안 쉬면서 힘을 모았던 게다. (P.132)』
추운 겨울에도 서리를 맞으며 꽃이 피어난다. 당장은 꽃이 피지 않았어도 이듬해 활짝 핀 얼굴을 자랑하기도 한다. 현재 나는 어느 시기에 머물러 있을까. 아마도 더 활짝 피고 싶어서 비료를 준비하고, 햇빛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기인 것 같다.
내가 요새 습관처럼 쓰는 '조급해지지 말자'라는 문장 뒤에는 불안한 조급함이 숨어 있다. 어느 순간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좀 더 많고 빠른 성과만을 원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휴학을 하였다. 잠깐 멈추어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커다란 바램과 함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쉽게 지울 수는 없다. 그래도 한 번에 피우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지 하며 묵묵히 인내하는 법을, 꽃을 통해 배운다.
『몹시 추운 밤. 늦서리에도 불구하고 내 정원에서는 거의 기적처럼 그 어떤 식물도, 꽃도 얼어 죽지 않았다. 내 사랑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거든. 사랑은 온기, 그렇다, 마음의 온기, 가장 차가운 서리에도 꿋꿋이 맞설 수 있게 해주는. (P.136)』
정원을 향한 저자의 사랑은 간절하고 애틋하다. 여름의 끝을 두려워하지만 겨울은 다가온다. 그리고는 무섭도록 추운 화원의 겨울밤을 사랑으로 채운다. 하지만 그 애절함에도 영원한 생명은 없다. 가을이 지나가면 많은 꽃이 시들고 낙엽으로 떨어진다. 설치류의 공격으로 애지중지하던 버드나무의 생이 종결되었다. 저자는 피 흘리는 기분으로 울부짖지만 막을 수는 없다. 그저 떠나보내고 다른 겨울 꽃들을 맞이해야 한다. 절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정원을 향한 예찬은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나의 정원.
이 책에는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초반에는 사실 꽃의 이름을 억지로 외우다 보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후에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저자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접근하였다. 두껍지 않은 분량과 중간중간 꽃의 삽화가 여유로운 독서를 도와준다.
꽃들은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 그리고 그 꽃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가꿔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잘 산다, 저렇게 하지 마라 가 아닌 그저 정원의 일상을 보여주며 우리 삶의 피로를 달래주는 책이다. 천천히 음미하는 휴식의 독서로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