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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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에 관해 설명한 책으로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영어 학습서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 어원에서 파생된 다양한 단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어야 했을텐데 끔찍하게 지루했습니다. 표제어로 어원 하나 갖다 놓고 남은 여백에 표를 그려 왼쪽엔 파생단어 오른쪽엔 의미와 용례가 나열되어 있는 책이었지요. 어떻게든 쉽게 단어를 외워보고자 했던 제 꼼수(좋게 말하면 효율적인 공부)는 실패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을 봤을 때도 그냥 그저그랬습니다. 표지엔 Book을 애벌레처럼 그려놓고 책벌레를 연상하게 한 것도 독자를 확실하게 재워버리겠단 신호인가 잠시 의심했지요. 그런데 웬걸, 정말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독서를 마친 후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딱히 기억나는 단어는 없지만(;;;;;)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단어에 대한 사랑엔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책벌레’ 혹은 시쳇말로 ‘단어충’으로 살아왔을 작가의 인생에서 비롯된, 이 작가 특유의 너스레와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유머가 제 취향에 딱 맞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입니다(그런데 아무도 안 읽습니다.).

또한 단어 의미의 시작과 변천과 함께, 단어가 만들어지고 의미가 변천하던 시기의 영어권 문화와 역사, 그로 인해 당대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알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요. ‘a turn-up for the books’가 ‘뜻밖의 횡재’를 뜻하는 이유를 읽어나가다 보면 독자들은 토마스 모어의 말에서부터 빅토리아 시대 영국 경마장의 풍습까지 알게 됩니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방식도 재미있습니다. 첫째 챕터에서 한 도박이야기에서 도박으로 ‘pool their money(돈을 한데 모으다)’한 이야기를 꺼내고 이때 ‘pool’이 닭과 유전자랑 관계있다고 말한 다음, 다음 챕터에서 단어 ‘pool’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식입니다, 닭을 이용한 프랑스 도박 이야기부터 시작해서요.

챕터 중엔 ‘Autopeotomy(자가음경절제)’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선 옥스포드 영어사전 편찬의 일등 공신인 제임스 머리와 윌리엄 마이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둘 다 특이한 인물입니다. 약 25개 언어(통가어를 포함한)를 구사하는 편집장 제임스 머리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목동 출신이었습니다. 독학으로 언어를 공부해 교사생활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에게 수천 건에 달하는 단어 용례를 보내준 윌리엄 마이너는 살인자에 정신병원 수감자였습니다. 예일대 출신의 의사이자, 남북전쟁 당시 북군 군의관이었던 마이너는 복잡하고 방탕한 여자문제로 전출 당한 후 광기에 사로 잡혀 강제전역을 당합니다. 남북전쟁 당시 의사였던 그가 한 일은 탈영병의 뺨에 불로 달군 낙인을 찍는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이 광기의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겁니다. 영국으로 건너 온 그는 결국 자신이 낙인을 찍은 병사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죄없는 시민을 죽이게 되고, 정신병원에 수감됩니다. 거기서 제임스 머리의, 단어의 역사를 위해 문학 작품 속에서 단어와 해당 용례를 우편으로 보내주십사 하는 자원 기고자 모집 광고를 보게 되고 수천 건의 단어를 우편으로 보내 사전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여기서 필자의 말 들어보겠습니다. “마이너는 남는 게 시간인 데다가 정신이상 범죄자라는 장점까지 있었지요. 사전 만드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장점입니다.”

결국 제임스 머리는 존경하올 윌리엄 마이너가 정신이상자임을 알게 되고 친구가 되어 그를 도우려 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윌리엄 마이너는 ‘자신의 음경을 스스로 절제(autopeotomy)’합니다. 이후 제임스 머리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조력을 얻어 윌리엄 마이너는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칩니다.

최근 이에 관한 영화를 봤습니다. <프로페서 앤 매드 맨>(한글 번역제는 불가능했을까요..). 영화는 단어 추적과 사전 편찬의 과정보다는 제임스 머리와 윌리엄 마이너의 드라마에 집중하며 참회와 용서,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멜 깁슨이 머리 역할을, 숀 펜이 마이너 역할을 맡았어요. 빅토리아 시대의 사극이라 당대 건물이나 문구, 옷 보는 재미도 좋았습니다. 마이너가 죽인 ‘선량한 시민’의 아내는 아이가 6명이 딸린 가난한 여인이었지요. 마이너의 참회의 여정은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책 이야기하다가 딴 데로 새버렸네요. 아무튼 책은 다음 챕터에서 윈스턴 처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어쩌다 전차 tank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거기엔… 그래서 그 단어는…

단어는 무수하고 역사를 탐구하는 여정은 끝이 없고, 살아 변하는 단어의 인생도 다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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