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앵무새 죽이기>를 처음 읽은 때는 1993년이었습니다. 세상에나. 아직도 93년은 제게 그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음을 시시콜콜 말할 수 있는 가까운 시간인데 26년 전이군요. 26년 전의 시시콜콜이 두뇌에 차지한 면적 때문인지 책의 내용은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읽을 때 재미있었다. 스카웃이 귀여웠다. 스카웃의 영웅적인 행동으로-뭐였더라 두려움에도 아랑곳없이 할 말을 해서였는데-아버지를 구했다. 인종차별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끝.

새로운 장정으로 출판되자마자 구입한 것 같은데 책꽂이의 정령마냥 서려있기만 했던 세월이 지나고, 얼마 전 다시 읽기를 마쳤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읽었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내용이 새롭더군요 ;;;

첫 독서가 남긴 가난한 기억에도 불구, 스카웃이 메이콤의 감옥으로 톰과 핀치 변호사에게 린치를 하기 위해 몰려온 마을 사람들을 물리치는-이라기보다 그들의 선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스스로 돌아가게 만드는-부분은 당시에 보던 그대로의 장면이었습니다. 26년 간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저는 이 장면을 문득 떠올리곤 했는데, 언제나 어둠, 그리고 핀치 변호사가 켜둔 한 점의 여린 전등빛과 함께 떠올랐지요. 가끔 저는 그 장면을 읽은 것이 아니라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 적도 있습니다(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독서에서 인상적인 것은 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첫 독서 때보다 스카웃과의 심리적 거리가 많이 멀어졌어요. 관찰하는 서술자지만 뚜렷한 캐릭터를 갖고 서사에 기여하는 바가 많았지만, 애티커스 핀치에게 눈을 빼앗기는 바람에 솔직히 스카웃은 눈에 덜 들어오더군요. 그는 시민으로서 부모로서 모든 면에서 제게 반성 거리를 한아름 안겨준 캐릭터였으니 말이죠. 이상주의자면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환경적으로 혹은 태생적으로 약하게 태어나 악하게 된 자들에 대한 연민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변호사 답게, 법정이 아닌 일상 공간에서도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몸에 배인 사람 말이지요. 심지어 패배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대답을 이 인물로부터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애티커스 핀치의 이런 성품이 직업도 좋고, 머리도 좋고, 심지어 명사수에 이웃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는 후광이 없을 때 그에게 얼마만큼의 고통을 안겨줄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긴 했지만요.

사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어요. 정말이지 딱 한 장면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톰 로빈슨의 재판을 몰래 방청간 꼬마들 중 하나인 딜이 우는 장면이지요. 검사가 다른 증인에게와는 다르게 톰을 박대하자, 딜은 울기 시작합니다. (재판 장면은 이 소설의 핵심 서사임에도 작가는 서술자인 스카웃을 딜과 함께 법정에서 나오게 하여 그 장면 일부를 놓치게 만들어요. 지금은 이해하지만 처음엔 의아했지요.) 스카웃이 딜에게 우는 이유를 묻습니다.

—-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바로 그 사람 때문이야.” 딜이 말했습니다.
“누구, 톰 말이야?”
“그 늙은이 길머 검사 말이야. 그런 식으로 그를 대하다니, 그렇게 경멸적으로 말하다니...”
“딜, 그게 그분의 직업이잖아. 검사들이 없다면, 그럼 아마 피고를 변호해 줄 변호사들도 없게 될걸.”
딜은 참을성 있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스카웃, 나도 그건 알아. 난 바로 그 사람의 말투 때문에 구역질이 난 거야. 그냥 구역질 말이야.”
—-


스카웃은 톰이 흑인이라 어쩔 수 없다며 세간의 편견을 전하고, 딜은 그런 건 손톱만큼도 옳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그때 동네 또라이 돌퍼스 레이먼드 아저씨가 울던 딜을 위로합니다.


—-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 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만 나이를 더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아저씨, 내가 도대체 뭐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딜의 남자다움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고통 때문에 우는 거지.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이야. 흑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생각한 것도 아닌데 백인이 흑인에게 안겨 주는 그 고통 때문에 우는 거란 말이다.”




위로 받은 딜은 눈물을 그쳤지만, 위로를 읽은 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는 어른인 제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다시는 그 어린 양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지요. 다만 아직 살 날이 남았고, 이왕이면 레이먼드 아저씨처럼, 모디 아줌마처럼, 애티커스 핀치처럼, 아서 래들리처럼, 착해서 고난받은 톰 로빈슨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위로를 할 땐 역시 먹을 걸 같이 주면서 해야 합니다. 콜라는 두 번 사람을 구했어요. 한 번은 이 책에서, 또 한 번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