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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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9일. 프랑스에서는 희대의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범인인 장클로드 로망은 자신의 아이들 둘과 아내를 죽인 후 장소를 옮겨 자신의 부모와 부모가 기르던 애견을 죽이고, 다시 내연의 관계였던 여성을 만나 살인을 시도합니다(이 여성은 살았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세계 보건 기구(WTO) 연구원으로 ‘의학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가 되어 장관들과 자주 접촉하고 국제회의에 빈번하게 참석’하는 사람이었던 장클로드는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경력은 가짜였습니다. 그는 의대 2학년 때 진급시험을 치지 않았고 이후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지요. 그의 가족, 친구, 지인들은 그의 경력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 점잖고 예의바르며 똑똑하고 타인에게 헌신적인 남자, 자신의 경력의 증거들을 늘 제시하며 신뢰를 주었던 남자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출근을 가장하여 집을 나온 후 제네바 세계 보건 기구 건물에 방문객으로 들어가 자신의 재직을 증명해줄 만한 무료팜플렛을 모으고 그곳에서 밥을 먹고, 아니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산층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18% 이자를 주는, WTO 재직자만 가입 가능한 신탁에 돈을 맡기라며 부모, 장인, 삼촌, 정부 등의 목돈을 받은 후 그걸로 흥청망청 써댔지요. 파국이 다가올 것을 안 것은 정확히 그 많던 돈이 떨어졌을 때였습니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며 의견을 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 소통하게 되고 무기징역(22년 간 가석방 신청 금지)을 선고받는 마지막 재판까지 작가는 그를 지켜보며 그를 이해하려 합니다. 정확히는 범죄의 동기겠지요. 심연의 어둠, 그 깊이를 파보고 싶지 않은 일은 여러 이점이 있지 않습니까. 학술적인 면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면에서, 범죄 재발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장클로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 아방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는 절대 진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모범적인 가장을 연기했다면 이제는 모범적인 수인, 참회하는 종교인으로 역할 전환을 할 때였지요. 그 전환은 성공적으로 연착륙합니다. 아마 카레르의 집필에 동의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카레르는 붕괴합니다. 읽다 만 카레르의 소설 <왕국>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이후 몇 년 간 작가로서의 회의감에 사로잡혀 글을 쓰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했다는 이야길 어디서 읽었습니다. 장클로드 로망이 주는 공포는 ‘무’입니다. 아무것도 없음. 진실의 입자라곤 그 어디에도, 완벽한 없음으로 텅 비어 있는 한 사람의 내면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 환멸나는 상처를 남깁니다. (서양에선 ‘무’를 악 혹은 공포로 묘사하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미하엘 엔데의 <교외의 집>에 잘 묘사되었지요. 반영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무’는 나치즘이었을 것입니다.)

“전달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사건들은 저를 심한 혼란에 빠뜨렸고 새로운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다가와 불면과 괴로움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루오의 <성스러운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캄캄한 밤에 예기치 않게 출현한 신의 모습은 그 뚜렷한 예시의 사건들 중 하나입니다. 가장 힘겨운 낙담의 시간을 보낸 후, 저의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가져다준 내면의 불길이자 깊은 평화였습니다.”

옥 중에서 자신의 옥바라지를 하는 가톨릭 신도에게 쓴 편지 중 일부입니다. 고난이 성장의 발판이 된다는 교훈도, 신의 사랑도, 일체의 언어도 이 사람에게 잡히면 의미의 농도는 옅어지다 결국 무로 떨어지고 말지요. 이 소설은 장클로드 로망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 그 ‘무’를 함부로 들여다본 작가의 고통의 기록입니다.








*장클로드 로망은 2019년 올해 가석방되었습니다. 모범수이기에 가능했겠지요. 로망의 것에 속하는, 집필에 필요했던 모든 자료들은 카레르가 갖고 있고 출소 후 돌려주기로 했다는데 둘이 만났을까요?
https://t.co/pxo54Us11C

*”<적>이라는 제목은 종교적인 질문을 해결하고자 우연히 읽게 된 성서에서 비롯되었다. 악마를 규정하는 최종적인 의미는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 엠마뉘엘 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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