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걸음을 늦추었다.
“<볼숭 사가>를 아시나요?”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연하지요-그녀가 내게 말했다-그 비극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니벨룽게네이드>로 바꾼 게르만 족에 의해 망쳐졌지요.”
나는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브린힐트, 당신은 마치 우리가 누워 있는 침대 사이에 칼이 놓여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걷는군요.”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울리카> 중


북유럽신화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모태신화? <마스크>에서 잠깐 언급된 로키? 게임 <라그나로크>? 마블의 영웅 <토르>? 전부다 이름만 살짝살짝 들어봤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보르헤스의 단편 <울리카>를 읽다가 앞 부분에 인용한 저 대목을 보게 되었지요. 볼숭 사가는 무엇이며 ‘나’는 왜 울리카를 브린힐트라고 부르는 것일까. 침대 사이에 왜 칼이 꽂혀 있지? 그래서 찾아 읽은 것이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입니다. 옮긴이는 <에다>, <스노리 에다> 그리고 고대 북유럽의 신화가 녹아들어간 중세의 영웅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책 이름이 ‘북유럽 신화’가 아니라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인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언어로 적힌 <에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독일어 번역서들을 참조해 옮긴이 본인이 읽은 것을 간추리고 엮어서 독자들에게 들려주니까요. 그래서인지 중간중간에 서술자 개입이 많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은 여느 종교의 창조신화와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태초의 공간, 북쪽의 니플하임에는 추위가 남쪽의 무스펠하임에는 더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텅 비어 있었지요. 어느 날 니플하임의 얼음에 틈-혼돈으로 알고 있는 카오스의 원 뜻이 틈이라고 하지요. 한편 이 틈에서 세상이 창조되고 그 틈은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의 생식기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이 생겨 물이 흘러나오고 무스펠하임의 열기도 점점 올라와 두 세계는 만나게 되어 태초의 거인 이미르, 태초의 암소 아움둠라가 출현합니다. 이미르는 아움둠라의 젖을 먹고 자라고 아움둠라가 근처의 소금돌을 핥자 신들의 아버지 부리가 나타납니다. 이후 이미르는 죽고 이미르의 몸은 현재의 세상-땅, 바다, 강, 산맥, 하늘, 구름 등-이 되고 거인과 바제 신들, 오딘을 비롯한 아제 신들, 난쟁이, 그리고 인간이 각각의 구역에서 살아갑니다. 요툰하임엔 거인들이, 아제 신들은 아스가르드에서, 난쟁이들은 지하에서, 인간들은 중간계(미트가르트)에서 각각 살아가며 서로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사랑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들의 원전에 해당하는 <에다>는 800-1200년 사이 당대 시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북유럽에 이미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린 때라 기록하는 시인들의 태도는 신성한 이야기의 전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엮는다는 점을 중시한 것 같습니다. 신들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졸렬하며 무기력합니다. 이들이 신으로서 생명을 갖고 있었을 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겠지요. 결국 신들은 라그나뢰크(신들의 황혼)를 맞이하고 그 존재는 없어집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전승되고, 19세기 낭만주의의 토대 중 하나가 되어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헌신하게 되지요. 우리나라도 단군신화를 그렇게 이용을 했으니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오딘, 토르, 프라야, 로키 신들의 이야기는 결국 투쟁과 전쟁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상대는 거인족들이구요.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거인족은 가혹한 북유럽의 환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신화는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한 사람 본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세상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질서지웠는지 알 수 있는 거울이란 점을 감안하자면 적절한 설명이지요.

신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중세 영웅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역시 뵐중(볼숭) 사가의 영웅 지구르트(시구르트.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지그프리드) 이야기가 역시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르치발, 로엔그린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구요. 다만 신화가 고대에서 중세로 배경을 옮겨가면서, 여성의 이미지가 투쟁하며 독립적인 이미지에서(특히 거인 여성들 잘 싸웁니다) 점점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식물처럼 여위어 가는 점은 안타까웠습니다. 농경문화의 시작과 기독교 신앙의 개입이 그 원인이 아닐까 하지요.

그래서 보르헤스의 저 이야기는 무엇이냐구요? 볼숭(뵐중)은 지구르트의 출신 가문이고, 브린힐트는 지구르트와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발퀴레 여신들 중 한 명이었더군요. <에다> 중, 니플룽겐족의 최후를 다룬 이 신화가 중세 게르만 족의 이야기로 개작되면서 ‘망쳐졌다’는데 저도 한 표 거들겠습니다.









* 여기저기 신화의 파편들이, 그리스 신화 못지 않게 많았습니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발할라(발할)
- 영어 그리고 독일어 단어 목요일의 어원(Thursday-토르 신 Thor, Donnerstag-Donar 토르 신의 다른 이름)
- 영어와 독일어 단어 금요일의 어원(Friday, Freitag-프리크 여신의 이름)
- 토르의 망치에서 비롯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 광전사 베르제르커(베르세르크)는 원래 곰가죽을 뒤집어 쓴 채 싸웠다는 것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원형이 니플룽겐 족의 최후 이야기에 나오는 브린힐데
- 이그드라실 나무에 달려 죽은 다음 살아난 오딘과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부활하는 예수

* 오브리 비어즐리가 그린 이졸데 공주가 있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그 이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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