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구한말, 통영엔 약국을 하는 김봉제와 그의 동생 김봉룡이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형과 달리 난폭한 성격이었지요. 그의 전실은 봉룡의 매에 골병이 들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후실로 들어온 숙정은 그 아름다움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비극은 숙정을 홀로 사모하던 송욱이 상사에 못 이겨 숙정의 집에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송욱을 본 봉룡은 숙정을 심하게 때리고 도망간 송욱을 쫓아 칼로 베어죽입니다. 숙정은 어린 아들 성수를 두고 비상을 먹고 자살하고, 봉룡은 도망칩니다.

성수는 큰아버지 김봉제의 집에서 자라고,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 봉제의 후사를 잇습니다. 그리고 한실 출신의 탁분시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그 아기는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고, 딸 다섯을 더 낳습니다. 이 다섯이 ‘김약국의 딸들’입니다.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집안이라, 한실댁은 서먹한 남편과의 관계 빼고는 크게 힘들지 않습니다.

“한실댁은 그 많은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기를 때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가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자식과 바꿀까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 같이 어여쁘니 으레 남들이 다 시중들 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이 꾸며 나갈 것이니 걱정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연한 배 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할 것라는 것이다.”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엔 걸핏하면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운명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다섯 딸들의 운명도 역시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고통을 갖습니다.

박경리는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자 그 서사 사이사이에 인물들의 운명을 직조한 시공간에 관한 통찰을 잘 저며놓는 작가입니다. 여느 문학 작품이 그러지 않겠느냐만 이 작가는 그 도가 탁월하지요. 또한 인물의 입체성은 독자가 그들의 삶과 나란히 갈 수 있게 합니다. 감정이입의 폭도 크고, 생활묘사가 주는 생생한 현실감도 만만치 않지요.

인물의 삶을 휘두르는 건 가부장제입니다. 저항하면 저항하는 대로, 순응하면 순응하는 대로, 타고난 정체성을 누르고 제도에 자신을 끼워넣거나 빠져나오려는 그들의 삶은 처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혼과 함께 받은 생물로서의 본능과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사회가 그들에게 내리는 철퇴는 야만스럽고, 그것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은 서서히 자신을 잃고 소멸합니다. 마지막 장면도 그렇습니다. 비극의 현장인 통영을 떠나는 인물들을 두고, 책에 실린 작품해설은 ‘끝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견디고 버티게 하는 한 줄기 빛’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인물들을 압박한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빛을 찾을 수 있을까요?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인물에게 닥칠 수난을 예고해주는 것 아닌가 합니다.

끝을 희망적으로 해석하는데 드는 거부감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결국 통영을 빠져나가는 이들은, 이를테면 ‘살아남은’ 것인데, 타자들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다른 인물들을 이렇게 ‘하나 남은 희망’을 위해 소모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소설엔 서브플롯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유난히 서러운 사연을 품은 경우가 많습니다. 지석원이나 옥화 등의 삶에 대해 독자가 품은 아픈 마음이 아직 여물지도 않았는걸요.

따라서 ‘견디고 버티게 하는 한 줄기 빛’ 혹은 ‘비극의 극복 가능성’이란 말보다 비극에 저항하고 욕망에 떳떳한 여성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작품이 출간된 것은 1962년. 7년 후, 박경리는 세상에 <토지>를 내놓기 시작합니다. 서막이었던 거지요.




*어휘풀이를 각주 처리 하지 않고 뒤에 부록으로 실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별표 해놓고 뜻이 없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