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만나는 법
나는 점점 연우 곁에서 멀어졌다. 연우와 아저씨의 슬픔이 점점 커져서 내 슬픔은 점점 작아졌다. 나도 슬픔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아무하고도 나눌 수가 없었다. 슬픔을 내 안에만 담아 두려니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가슴은 점점 텅 비어만 갔다. 그 허전함을 채우려고 사료를 먹어 보지만,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플러렛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면 -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엄마로서 내가 그애한테 무언의 선물을 줄 수 있다면 - 그 선물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 우리는 우리한테 혹은 다른 누군가한테 말썽이 생겼을 때 종종걸음으로 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달아나서 숨지 않는다.플러렛은 어머니를 보아왔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의 방식을 배웠다. 나는 플러렛이 나 또한 봐주기를, 나를 통해 뭔가 다른 것을 배우기를 소망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흩어진 사고의 기록을 모아놓으면 공통의 문제점이 보인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초반 적응 시스템이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는 것, 기본적인 노동조건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 조직의 최약자인 그들에게 할당됐다는 것,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 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것이다. 안전교육을 받기보다 ‘이런저런 거 조심하라‘는 식으로말 몇 마디를 듣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고 욕설과 명령 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노출됐다. 노동에 단련되지 못한 서툰 몸으로 야근까지 감당했다. 학습도 실습도 아닌 중노동에 심신이 극도로피폐해진 상태에서 그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구제로서 죽음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