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추의 마음     나희덕(羅喜德)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배추의 마음 시로 알고 있던 나희덕 시인.

배추의 마음이라는 시에서처럼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는 시인이라고 생각해서 새로운 시집을 집어들었다.



 

파일명 서정시라니...

책을 종이로 읽지 않고 인터넷으로 읽는 사회에 맞춘 시집 이름인가?

하고 생각하며 읽어나갈 무렵

파일명 서정시

라는 시가 나왔다.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나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이라는 각주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로 시작되는 시는 중간에 이런 구절이 이어진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이렇듯 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생각하게 해준다.

글을 쓰라고 할 때에는 짧은 시가 쉽다며 시를 쓰면서도

읽으러고 할 때에는 시는 너무 어렵다며 손대지 않는 사람들.

나조차도 가지고 있는 시집이 몇권 안되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하는 것은 2부에 있었다.


.



.



조재룡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삶이 고통으로 점철될 때, 비극이 무람없이 현실의 문을 열고 재난처럼 수시로 들이닥칠 때, 비극이 소통과 대화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사방에 묵시록처럼 퍼져나갈 때,

시는 거친 언어, 거친 산문과 같은 형식을 과감히 끌어안는다.

언제부터인가 나희덕의 시는 성찰과 돌봄의 맑고 고운 서정시가 아니라 점점 피를 흘리고 찢긴 상처로 위험과 재난의 목소라를 흘려보내는 싸이렌의 노래개 가까워졌다.


이는 지난 날 우리에게도 있어왔던 재난과 비극, 삶의 고통 때문이다.

들린 발꿈치로 살아가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난파된 교실에서 함께 침몰되는 고등학생들,

지진, 환경오염, 대학의 학과 통폐합에 

눈을 감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라는 2부의 제목은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 눈을 돌라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개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2부 외에도 1,3,4부 역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를 각주에서 소개하는 다른 작품들로 깊이 이끌어나간다.


https://m.youtube.com/watch?v=7PLYoDgqIyI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작품 Rhythm 0은 시와 함께 영상을 보고 나니 더욱 와닿았다.

꽤 많은 각주들은 독자들의 이런 경험을 위한 장치인걸까?

자꾸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