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당시 글짓기 주제는 ‘미래의 나’였다.

여물지 않은 머리로 미래의 내 모습을 적었다.

구체적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상상한 이미지만 선명하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을의 도시를 걷는 남자.

어디선가 보았을 매체의 영향이 분명하다.

열심히 적어 제출한 글은 무참한 평가와 함께 돌아왔다.

아이답지 않은 글이라 누군가의 대필이 의심된다는 평가였다.

교사에게 트렌치코트를 입고 고독을 씹는 가을 남자는 어린이답지 않은 이미지였다.

아이의 세계에 트렌치코트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고독도 어울리는 정서가 아니다.

가을 남자가 아닌 봄의 아이가 어린이다운 미래다.

밝고 씩씩하며 착하고 어린이다우며 순진무구한 표현을 쓰는 글쓰기야말로 그들의 바람이었다.

독일의 8대 총리 메르켈은 16년간 총리직을 수행 후 2021년 퇴임했다.

총리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메르켈의 퇴임 기사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독일 어린이들 사이에서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왔다는 문장이다.

질문을 한 아이들이 자란 시대의 총리는 여자였다.

어린이가 보는 텔레비전에서도 인터넷 뉴스와 신문 기사에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16년간 변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세계였다.

16년도 이러한데, 35년은 어린이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놓을까.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켰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도, 조선이란 이름도 과거가 되었다.

육첩방도 아닌 한반도가 남의 나라가 되었다.

강제병합 이후 태어난 어린이에게는 조선도, 대한제국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조선어와 가족, 이웃, 문화, 어른들이 알려주는 역사가 어린이에게 제국주의 국가와 다름을 알려주고, 그 흔적을 짐작게 한다.

제국주의 일본은 3.1 운동의 뜨거운 맛을 보고 문화통치로 그 방향을 전환했고, 문화통치는 곧 내선일체로 나아갔다.

《제국의 어린이들》은 이 내선일체가 한창이던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글짓기 경연대회의 수상작들을 자세히 분석한 책이다.

책에 소개되는 양국 어린이의 글은 단행본으로 나온 조선총독부 글짓기 경연대회의 제1회 수상작과 제2회 수상작들이다.

나라 잃은 조선의 어린이뿐 아니라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 즉 조선 땅의 일본 어린이들이 쓴 글도 나란히 실려있다.

내지(일본 본토)와 조선이 한 몸, 즉 내선일체가 식민 수탈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교육과 의무도 같아야 한다. 조선과 내지의 차별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선일체를 진심으로 믿고 황국신민이 되고자 했던 이봉창은 일본의 끊임 없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차별대우는 나라 잃은 설움을 키우고 설움은 현실을 알려줬다.

쇼와 천황에게 겨냥한 폭탄은 빗나가고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의거다.

교육 역시 달랐다.

지금의 윤리 교과에 해당하는 수신 교과서에는 일본 어린이가 배우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요컨데 ‘위를 쳐다보지 말라’, ‘분수를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를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쓸데없이 위를 올려다봐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분수를 알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로,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무슨 일이든지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략)

사람은 쓸데없이 위를 올려다보지 말아야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 등을 잘 고려하여 제각기 그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조선총독부 수신서 4학년』 16장 ‘분수를 알라’ 중에서


양국의 어린이는 언어도, 환경도 다르다.

글을 쓰려면 글을 배워야 한다. 

1938년 3월에 개정된 3차 교육령 시대부터는 조선 내 어린이 취학률은 ‘일본인 93.8%, 조선인 30.8%’였고, 일본어 교육의 비중도 ‘국어(일본어) 34.97%, 조선어 8.75%’였다. 

초등 교육기관인 소학교에 취학해 모어가 아닌 일본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조선의 어린이는 적었다.

‘국어(일본어)로 자유롭게 대화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작문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총독부 글짓기 대회에 일본어에 능숙한 지도 교관이 함께했다.

모어가 아닌 일본어의 서투른 표현은 조선어 잡지나 신문에 실린 글에서는 달라진다.


 일본 어린이는 수상작에서 순진무구하게 프랑스 인형, 란도셀, 축음기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물건을 가난한 조선인 어린이는 접할 수 없다. 

요오코 양이 조선인 여아에게 "느 집엔 이거 없지?"란 말과 함께 프랑스 인형을 자랑하며 “너 프랑스 인형이 예쁘단다”란 말을 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 보자.


 가난한 조선인 어린이만이 가계 일을 도우며 별다른 오락 거리도 없다. 일제에 협력하는 고관들의 자제는 물론 상황이 또 다르다.


 양국 어린이들이 받은 수상작들은 ‘일본 제국’, 그리고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상에 걸맞은 글이다. 

MZ세대 소년이 꿈꾸었던 어린이답지 않은 이미지는 없다.

어떻게 써야 수상할 수 있는지 계산했거나 무구한 마음에 그런 삿된 정서가 자리 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분노와 울분, 양국 어린이 사이의 혐오를 드러내는 감정 또한 없다. 


《제국의 어린이들》에서는 테마별로 분류한 수상작들의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한다.  


무구한 시선에도 시대의 어둠은 담겨있다.

가난, 질병, 죽음, 병사, 전사, 부상.

어둠은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

오랜 기간 지속된 식민지배는 어린이의 눈과 마음을 가렸다.

국가와 천황을 위해 동원되는 가족과 어른들을 향한 순진한 목소리는

모범 답안처럼 전쟁을 응원한다.

때로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한다. 

파치, 파치(빵야, 빵야) 쏘는 신나는 총소리가 무서운 소리임을 모른다.

수상작에 깊게 박힌 국가주의도 비극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오빠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중략)

손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쪼글쪼글해져 있었습니다. 한쪽 눈은 유리 눈입니다. 그 눈은 천황 폐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가슴 위에는 검은 총알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어린이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가을 남자가 아닌 지나인들을 학살하는 병사들을 흉내낸다.

병사님들처럼 천황의 신민이 되겠다는 맹세를 한다.

순수하고 맹목적인 어린이다운 마음을 제국주의 일본의 욕망이 채우고 있다.

제국주의의 폭력은 무겁게 어린이를 짓누른다. 어린이의 세계를 장악한다. 

일제의 욕망은 순진무구한 양국 어린이의 눈으로 투명하게 비추어진다.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목소리는 이 모범적 수상작에 끼어들 틈이 없다. 

병사님들을 위한 편지를 보다 잘 쓰기 위해 나무 판 돈을 모으던 정태옥 어린이의 글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린이는 집 안에서 신을 모시는 '신단'이라는 이질적 의무에 부응하기 위해 저금통을 깬다.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더라도, 신 아래에서 즐겁게 살아가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란 마음으로 다짐한다.

일제의 추악한 욕망이 어린이의 마음을 채워 휘두르지만 정태옥 어린이의 행복을 향한 마음은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학교에 가지도, 글을 배우지도 못한 조선의 어린이들이 있다.

추위와 더위, 주린 배를 참고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죽어 나가던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른들이 좋아할 내용이 절대 아니리라. 제국주의 일본이 지우고 싶은 목소리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이 아이들도 행복한 그 날이 반드시 오길 진심으로 바랐을 터다.


잃어버린 무언가는 어린이를 찾아온다. 

추악하고 어두운 세계가 파괴되고 새로운 세계가 어린이의 눈과 마음을 씻는다. 

세계의 이름은 광복이다.


https://youtu.be/98D5d62A6iQ?feature=shared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reatDane 2025-09-0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blog.naver.com/ba8949/223995644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