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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ㅣ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17살의 세실은 2년전 기숙학교에서 나와 아버지 레몽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레몽은 아내와 사별한 후 여러 여성과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자유분방한 인물이다. 세실과 레몽, 그리고 그의 젊은 애인 엘자는 외곽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엘자는 레몽과 비슷한 성향의 소유자로, 깊은 관계나 구속을 요구하지 않는 가벼운 성격이다. 세실은 내심 자신을 엘자와는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 제약을 싫어하고 진지함을 기피하는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어머니의 친구이자 지적인 여성인 안이 별장을 찾아온다. 안은 우아함과 엄격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가벼운 엘자와는 확연히 대조되는 무게감을 지녔다. 오랫동안 레몽을 흠모해왔던 안은 결국 그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안은 세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방탕한 생활방식을 바로잡으려 하며, 세실과 아버지의 자유로운 세계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세실은 자신들을 옥죄어오는 안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10살 연상의 남자친구 시릴과 버림받은 엘자를 이용한다. 두 사람을 연인인 것처럼 위장시켜 레몽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안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녀를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계획은 성공적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레몽은 젊은 엘자에게 다시 흔들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를 목격한 안은 충격에 휩싸여 차를 몰고 떠나다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세상은 이를 불행한 사고라 여기지만, 세실만은 그것이 안의 선택이었음을 직감한다. 안의 죽음 이후 부녀는 잠시 슬픔에 잠기지만, 이내 예전의 방탕하고 자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제 세실의 내면에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서늘한 감정, 즉 ‘슬픔‘이 자리 잡게 된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적나라하게 포착해낸다. 이 소설에는 세실, 레몽, 안, 엘자, 시릴이라는 다섯 명의 인물만이 등장하지만, 사강은 이 짧은 분량 속에서도 각 인물의 성격과 외모, 성향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작품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인물들 사이의 묘한 공통점과 대조였다. 겉으로 보기에 세실과 레몽, 그리고 엘자는 쾌락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반면, 안과 시릴은 관계에 대한 진중함과 책임감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실은 자신을 안의 부류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본능적으로 레몽과 엘자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안의 죽음 이후 일상으로 돌아온 세실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향해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낸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슬픔‘이 곧 ‘안‘이라는 인물 그 자체를 대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안은 레몽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와 새로운 삶을 꿈꿨지만, 결국 자신이 레몽의 인생을 스쳐 지나간 숱한 여자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처절한 자각의 순간, 안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슬픔‘ 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마지막 장면에서 세실이 내뱉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인사는 곧 ˝안, 안녕“ 이라는 인사이기도 하고 세실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애써 외면해왔던 ‘슬픔‘이라는 감정에 건네는 인사이기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