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 자신이 이 책을 가리켜 '내 영혼의 자서전'이라 일컬을만큼, 지은이 자신의 삶의 체험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고 하는 데 책을 읽어보면 내 영혼의 자서전이 자신의 삶의 체험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둘로 나눈 후에 그에 대한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는 생각이 난다.
나르치스를 통해 헤세는 소심하고 행동보다는 지적 사고에 더 몰입했던 자신의 삶을 이상화하는 동시에,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감성과 관능에 대한 지극한 추구를 고백하고 싶었지 않나 싶다. 이는 단순히 삶을 지적인 여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구로 나눈 것 같이 보이지만, 헤세가 책에서 고백했듯이, "골드문트 자신과 사랑을 나눈 여자들이 매 맞을 줄 알면서도 남편에게 돌아가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듯이, 헤세는 이책을 통해 일반 사람들의 삶과는 유리된 지적 유희 - 사고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치열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나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한 순간 현실에서 떠나 그의 책에 침잠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처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왜 현대인은 포르노를 보는가? 포르노는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져서도 안되는 욕망을 투사한, 좋게 이야기 한다면 일종의 virtual reality이고 나쁘게 이야기 한다면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투사라는 관점에서 헤세의 이책은 일종의 정신적 포르노이다. 한편 특정한 설정 혹은 가정하에 자신의 욕망이 어디까지 발전될 수 있는 지를 살펴본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는 점에서 이책은 일종의 실험 보고서 - 과학 논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이 그런 것둘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의 문학이 인간에게 쾌감과 공감을 선사한다. 비록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감정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은 인간에게 진실이 아닌 가상이지만, 거짓이 아닌 진리로 다가 온다.
제목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지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골드문트이다. 자유를 갈구하고 세상에서 새로운 모험과 사랑을 꿈꾸며, 그러나 살인도 저지르는 등 삶의 부침도 겪는 등, 골드문트가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느껴진다. 반면, 나르치스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하나의 운명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종교와 학문에 가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을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는 그의 태도는 현대인에게는 "지가 뭔데."라는 반발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헤세의 여린 감성일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의 여린 감성이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기 위해 주인공 한스를 죽여버렸지만, 이 책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은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고 순간순간 인생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최소한의 희망으로 골드문트를 늙어서 죽게 만들었다. 최소한 그의 여린 감성은 인생의 무게를 조금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듯 하다.
이 책이 기존의 헤세의 책과 달라진 점은 성장을 넘어 노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쓸 당시 헤세는 50세가 넘으면서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는 이 책에서 늙은 골드문트가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도 여자 - 그리고 그들의 육체에서 나오는 풍요로움과 삶의 활력을 잊지 못해 근처 마을의 여성들을 유혹하려고나 그녀들이 자신과 재미있게 대화를 할 지언정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걸 보면서 자신이 늙었고 더 이상 그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장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 하다. 이는 눈부신 성장의 이야기인 1919년도의 데미안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매력을 읽은 인간도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는 그 대답을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남긴 몇 개의 작품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Legacy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골드문트의 모습은 유리알 유희의 요제프 크네히트에게 연결된다.
한국인은 왜 헤세를 좋아할까? "왜 하필 헤세를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에 헤세에 대한 여행기를 썼던 작가 정여울은 "헤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에 가까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헤세의 여정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이었고 그 과정에서 쓰인 문학 작품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방황하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고 적고 있다. 헤세는 기계적인 독일 교육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고 그는 성장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런 그의 글의 성격이 철저히 기계주의적으로 자본주의적인 한국 사회에서 갈려나가는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안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