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 근대의 문을 연 최후의 중세인 클래식 클라우드 26
이길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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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루터의 개혁은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고,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해석을 바꾸기를 원했다.

미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의

<1000년을 빛낸 세계의 100인>이라는 특별 방송에서

루터는 당당히 3위에 올랐다.

"그는 인간이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루터가 그토록 힘주어 외쳤던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의 정신이다.

 

 

 

 

루터는 유럽 중세 끝 무렵의 사람이다.

그 시절은 불안과 두려움과 죽음으로 대표된다.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와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 사회 전반을 바꾸어 버리는 교두보가 되었다.

페스트는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염병에

사제들도 대거 포함되었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는 사제의 양산이라는 악순환을 불렀다.

죽음의 그림자는 신이 형벌을 내린 결과로 선전되었고,

신의 심판과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지정한 의례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응해야 했다.

가톨릭교회는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한때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기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성직매매가 문제였다.

루터는 면벌부에 항거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다.

교회 안에서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가 신의 '소명'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하자

이에 대하여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 파문으로 답했다.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았다.

루터는 그는 생각을 철회,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선제후 프리드히리 3세는 루터의 안전을 걱정하여,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시켰는데,

1521년 5월에서 1522년 3월까지 약 10개월간

융커외르크라는 이름으로 바르트부르그성에 머물렀다.

이때 루터는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번역 성서는 발전한 미디어 환경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집단 독서'를 불러 일으키고,

독일어 사용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독일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작동하였다.

루터는 독일어로 된 회중 찬송도 만들었다.

​루터의 개혁 정신은 사적인 영역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제도였다.

로마 가톨릭의 독신주의를 결코 신앙생활을 위해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루터는 개혁 교회마다 학교와 도서관을 세웠고,

나아가 여성에게까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공교육의 장을 확대해 나갔다.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그가 끼친 영향은 크고 지속적이며 혁신적이다.

 

 

 

루터 스스로 그 모든 것을 기획한 것은 아니다. ​

단지 자신의 신앙적 깨달음에 진솔하여 반응했던 것이다.

루터는 모든 이들이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누구라도 쉽게 배우고 읽을 수 있는 성서를 돌려주었다.

중세의 끝자락에서 신앙의 옷을 입기는 했지만

힘차게 주체적 자아를 불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근세를 맞이한 문지기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 지원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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