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녀석 맛있겠다 - 별하나 그림책 4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1
미야니시 타츠야 글 그림, 백승인 옮김 / 달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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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자기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 존재다. 그래서 나와 타인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게 어렵다. 그렇지만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때론 어렵고 힘든 상황을 쉽고 유쾌하게 해결하기도 한다. 마치 <고 녀석 맛있겠다>에 나오는 주인공 안킬로사우르스처럼.

  넓디 넓은 곳에서 혼자 태어난 외톨이 안킬로사우르스는 부모를 잃은 외로운 영혼이다. 아이들에게 혼자라는 두려움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약하고 소외된 목숨은 생명줄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그 때 만난 어른이 하필 '고 녀석 맛있겠다'라며 침을 질질 흘리는 티라노사우르스라니! 나와 함께 책을 읽던 우리 반 아이들은 '꺄악! 이젠 죽었다. 큰일났다'라며 허둥댔다. 자기 몸의 수백 배도 더되는 티라노사우르스를 보면 기겁할 만한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린 안킬로사우르스는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 조차 모른다. 그야말로 백지 상태다.

  안다는 것은 선입견과 맥이 닿아 있다. 앞에 서있는 이 거대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니 겁이 날리가 없다. 겁을 내기는 커녕 안킬로사우르스는 급기야  "아빠"라고 부른다.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 아빠임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아, 이 천진함! 천진함 앞에서는 모든 게 무장해제된다. 어처구니없는 티라노사우르스는 자기처럼 되고 싶다는 말에 어느 덧 보호자가 된다. 그래서 안킬로사우르스를 먹기 위해 달려드는 키란타이사우르스와 한판 싸움을 벌인다. 자신의 아픔을 참으며 자기의 먹이를 구해주는 지경에 이른다. 무엇 때문일까? 안킬로사우르스의 천진함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서로를 알뜰히 챙기는 사이가 된 안킬로사우르스와 티라노사우르스. 생김새가 달라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믿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아픔쯤은 견딜 수 있게 하는 귀한 마음밭을 만들어 준다. 자기처럼 되고 싶다는 안킬로사우르스에게 꼬리 쓰는 법과 울부짖는 법박치기를 가르쳐 주는 티라노사우르스.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는 티라노사우르스의 모습이 눈물겹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에게 강하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이 자식들에게 해야 하는 일이다. 존재감을 잃지 말고 살아남는 법!

  아빠와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자는 제안을 하며 안킬로사우르스를 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보내며 안킬로사우르스가 따다 준 빨간 열매 한 알을 삼키는 키라노사우르스. 어찌보면 어른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싶어하는 어린이에게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떠나게 해주는 어른의 모습은 아닐까? 눈물을 머금고 제가 살아야 할 세계로 떠나 보내는 어른의 모습.

  천진한 아이와 더 나은 삶을 위해 아이를 떠나 보내는 속깊은 어른의 만남이 빛나는 <고 녀석 맛있겠다>. 아이들과 키득거리며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안킬로사우르스가 자기의 이름을 '고녀석 맛있겠다'로 말고 있고, 계속하여 반복되는 '맛있겠다'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입 속에 맴도는 '맛있겠다야, 맛있겠다야!'.....그리고 덩치 큰 아빠와 조그만 아들이 하는 양을 그림으로 대조시켜 놓고 있는 데 그것을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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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까투리
권정생 글, 김세현 그림 / 낮은산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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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를 살릴라고 엄마는 죽어요

- 에미, 그 눈물 나는 이름 -

  “애기를 살리랄고 엄마는 죽어요! 그래서 슬퍼서….”
  윤진이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끝내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순간 눈앞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어? 선생님도 울라 그런다.”
  짖궂은 준혁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려다 머쓱한 표정으로 앉는다. 다른 때처럼 ‘이 눔, 저 눔’하며 댓거리를 하지 않는 내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술렁거리던 아이들이 가라앉은 물결처럼 잔잔하다. 《엄마 까투리》를 읽으며 일어난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일곱 살짜리 계집애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슬픔이라곤 모를 것 같은 머루알 같은 계집애 눈동자를 붉게 물든인 걸까?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모성은 본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니 모성은 몸의 기억으로부터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열 두 살인 큰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뱃속에서 처음 몸을 움직이던 것이 떠오른다. 구렁이가 또아리 틀었던 것을 푸는 것처럼 아랫배가 움직이던 기억. 남편이 아이를 꾸짖을 때마다 나는 공연히 눈동자가 뻑뻑해지고 이내 눈앞이 흐려진다. 이성적인 판단과는 조금 거리가 먼 무조건적 반응이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감정적일까 묻고 묻다가 아이와 내가 한 몸으로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나는 열 달 동안 한 몸으로 살면서 서로의 몸으로 기억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멀리서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게 내 새끼인지 안다. 아이 역시 말도 못할 때 에미가 오는 퇴근 시간 즈음만 되면 아파트 현관 앞까지 기어가 앉아 낑낑거리며 보챘다. 보이지 않게 이어진 끈으로 에미가 제 곁으로 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걸 나는 몸의 기억으로 읽고 싶은 것이다. 결국 모성도 그 몸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씩 자라고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거라 본다. 까투리가 불 속에서 제 새끼를 위해 목숨줄을 놓는 것 역시 거역할 수 없는 몸의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제 품에서 꼬물거리던 것들의 움직임을 어찌 떨칠 수 있겠는가?

  《엄마 까투리》는 글과 그림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아이들의 호흡에 알맞게 짜여진 문장과 잡다한 겉치레를 버리고 고갱이만 그린 그림이 마치 오래 산 노부부가 말없이도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꿩병아리 아홉 마리(아홉이라는 숫자는 무척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를 등에 태우고 황급히 어딘가로 가고 있는 까투리. 불안에 떠는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허둥대는 까투리 곁에 장끼는 없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삶 자체만으로도 신산한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길함 속에서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야 하는 에미 마음은 얼마나 황망하고 다급할까?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 현실의 에미들 삶을 보는 듯 해 마음이 아리다. 길고 굵게 그려진 까투리의 다리가 멀리 도망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표지 그림을 보던 아이들은 까투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어디로 막 급하게 뛰어가니까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다며 침울해한다. 에미 등에 탄 새끼들의 몸짓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산불이 났습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보연이가 ‘아~하! 산불이 나서 까투리가 불에 타 죽는 거구나!’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른 체한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보연이에게 돌렸던 관심을 거둔다. 빨간 불길에 나무가 숯덩이가 되어 쓰러진다. 나무가 불에 타고 있는 장면이 사실적이지 않고 절제되어 있어 글의 흐름이 시작되는 서사 구조와 자연스럽게 맞물려진다. 뒤이어 온 산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멧돼지가 도망가요, 사슴도. 근데 까투리는 어디 있지?’하며 수선스럽다.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이 아이들 마음을 헤집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때 종종거리는 꿩병아리를 데리고 죽기 살기로 달려가는 까투리가 나타난다.

  “까투리가 울면서 도망가요. 죽을까봐 겁나서 막 뛰어가잖아요. 근데 애기들은 힘들겠다.”    육 개월 된 동생이 있는 세운이는 삐삐거리는 꿩병아리들을 보며 집에 있는 애기를 떠올린 걸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꿩병아리들과 점점 거세지는 바람과 불길 앞에서 마음이 타들어갈 것 같은 까투리. 불길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장면들이지만 온 산 전체에 악마의 혓바닥처럼 넘실대는 불길을 본 뒤라 산불이 얼마나 굉장한지, 또 까투리네에게 닥쳐 온 위급함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느껴진다. 아울러 사실적으로 불을 그리지 않은 것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까투리의 마음만을 따라가며 몰입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아이들은 ‘애기 한 마리가 넘어졌다, 엄마가 무지 놀란 것 같다, 애기 업으면 빨리 도망 못 간다’며 안타까워한다.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에미는 저도 모르게 날아오른다. 이 대목에서 보연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한다.

  “어, 애기들 어떻게 해! 근데 선생님, 엄마가 날라 갔다가 새끼들 생각나서 다시 날아 올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 표정을 살핀다. 저만치 날아갔던 까투리는 새끼들을 두고 온 것을 알고 황급히 몸을 되돌린다. 그렇게 몇 번을 날아올랐던 까투리는 결국 새끼들 곁에 남는다. 내 한 목숨 살겠다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에미를 부르는 새끼들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새끼들이 젖은 날개를 털며 비린내 풍기며 제 품에 기어들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에미는 품속에 새끼들을 넣고 날개를 꼭꼭 오므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에미를 덮치는 불길. 혼자 된 에미의 힘으로 어찌 그 험한 불길을 이길 수 있겠는가? 산불이 꺼진 장면에 그려진 새까만 나무 등걸들. 그 나무처럼 새까맣게 탔을 에미의 마음이 그려져 글을 읽는데 자꾸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삶은 죽음을 거쳐 온전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에미의 죽음은 아홉 까투리의 몸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까맣게 타들어간 숲에서 박서방아저씨가 발견한 것은 죽음으로 얻은 빛나는 생명이다. 그러니 죽은 까투리의 몸이 그토록 찬란한 빛깔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 까투리 몸 색깔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에서 ‘엄마는 죽어도 새끼가 커서 엄마가 되고, 또 새끼 낳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안 슬퍼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보연이 말처럼 까투리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직관으로 이야기를 읽어내는 아이들의 눈이 날카롭다. 역시 우리 반 아이들은 내 스승이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내면을 읽는 데 문득 우리 집 막내 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권정생선생님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돌아가셔서 이젠 못 보네. 참 속상해!”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기도를 드리던 모습. 그러나 비록 선생님은 곁에 없지만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까투리처럼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글로 영원히 우리 목숨 안에 존재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불속에서도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엄마 까투리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새끼들을 살린 까투리가 죽은 뒤 내리는 비를 인상적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거쳐 온전해지는 삶의 순환성을 무의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 까투리가 죽어서 슬프지만 새끼들이 또 새끼를 낳아서 엄마가 되니까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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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벌타령 우리문화그림책 온고지신 2
김기정 지음, 이형진 그림 / 책읽는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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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읽다보면 글맛이 참 잘진 것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옛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경우, 글맛이 좋으면 기분이 참 좋다.

우리말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만, 우리말을 맛갈나게 활용할 줄 알아야 남의 언어 역시 잘 구사할 줄 아는데  그런 노력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지나친 일이 아닐게다. 그런데 <장승 벌타령>을 읽으면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곡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는 맛도 좋았지만, 그림과 어울려 한 판 놀이를 벌이는 듯한 팔도 사투리 맛이 어찌나 신명나던지. 많은 우리문화 그림책이 그림이나 글의 서사가 부족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옛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살려가면서 장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승에 대해 조목조목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하고 있다. 그 팔도 장승들이 사투리를 스는 대목을 읽을 땐 그야말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게 된다.

우리 말 맛을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진다. 나 혼자 책을 읽고 재미있어 하기에는 아깝다.  얼른 개학이 되길 기다리게 된다. 긴장의 근을 놓쳐 게을러지기 쉬운 이월에 우리 아이들과 한바탕 우리 말 맛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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