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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까투리
권정생 글, 김세현 그림 / 낮은산 / 2008년 5월
평점 :
애기를 살릴라고 엄마는 죽어요
- 에미, 그 눈물 나는 이름 -
“애기를 살리랄고 엄마는 죽어요! 그래서 슬퍼서….”
윤진이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끝내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순간 눈앞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어? 선생님도 울라 그런다.”
짖궂은 준혁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려다 머쓱한 표정으로 앉는다. 다른 때처럼 ‘이 눔, 저 눔’하며 댓거리를 하지 않는 내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술렁거리던 아이들이 가라앉은 물결처럼 잔잔하다. 《엄마 까투리》를 읽으며 일어난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일곱 살짜리 계집애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슬픔이라곤 모를 것 같은 머루알 같은 계집애 눈동자를 붉게 물든인 걸까?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모성은 본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니 모성은 몸의 기억으로부터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열 두 살인 큰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뱃속에서 처음 몸을 움직이던 것이 떠오른다. 구렁이가 또아리 틀었던 것을 푸는 것처럼 아랫배가 움직이던 기억. 남편이 아이를 꾸짖을 때마다 나는 공연히 눈동자가 뻑뻑해지고 이내 눈앞이 흐려진다. 이성적인 판단과는 조금 거리가 먼 무조건적 반응이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감정적일까 묻고 묻다가 아이와 내가 한 몸으로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나는 열 달 동안 한 몸으로 살면서 서로의 몸으로 기억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멀리서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게 내 새끼인지 안다. 아이 역시 말도 못할 때 에미가 오는 퇴근 시간 즈음만 되면 아파트 현관 앞까지 기어가 앉아 낑낑거리며 보챘다. 보이지 않게 이어진 끈으로 에미가 제 곁으로 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걸 나는 몸의 기억으로 읽고 싶은 것이다. 결국 모성도 그 몸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씩 자라고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거라 본다. 까투리가 불 속에서 제 새끼를 위해 목숨줄을 놓는 것 역시 거역할 수 없는 몸의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제 품에서 꼬물거리던 것들의 움직임을 어찌 떨칠 수 있겠는가?
《엄마 까투리》는 글과 그림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아이들의 호흡에 알맞게 짜여진 문장과 잡다한 겉치레를 버리고 고갱이만 그린 그림이 마치 오래 산 노부부가 말없이도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꿩병아리 아홉 마리(아홉이라는 숫자는 무척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를 등에 태우고 황급히 어딘가로 가고 있는 까투리. 불안에 떠는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허둥대는 까투리 곁에 장끼는 없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삶 자체만으로도 신산한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길함 속에서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야 하는 에미 마음은 얼마나 황망하고 다급할까?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 현실의 에미들 삶을 보는 듯 해 마음이 아리다. 길고 굵게 그려진 까투리의 다리가 멀리 도망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표지 그림을 보던 아이들은 까투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어디로 막 급하게 뛰어가니까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다며 침울해한다. 에미 등에 탄 새끼들의 몸짓 또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산불이 났습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보연이가 ‘아~하! 산불이 나서 까투리가 불에 타 죽는 거구나!’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른 체한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보연이에게 돌렸던 관심을 거둔다. 빨간 불길에 나무가 숯덩이가 되어 쓰러진다. 나무가 불에 타고 있는 장면이 사실적이지 않고 절제되어 있어 글의 흐름이 시작되는 서사 구조와 자연스럽게 맞물려진다. 뒤이어 온 산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멧돼지가 도망가요, 사슴도. 근데 까투리는 어디 있지?’하며 수선스럽다.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이 아이들 마음을 헤집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때 종종거리는 꿩병아리를 데리고 죽기 살기로 달려가는 까투리가 나타난다.
“까투리가 울면서 도망가요. 죽을까봐 겁나서 막 뛰어가잖아요. 근데 애기들은 힘들겠다.” 육 개월 된 동생이 있는 세운이는 삐삐거리는 꿩병아리들을 보며 집에 있는 애기를 떠올린 걸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꿩병아리들과 점점 거세지는 바람과 불길 앞에서 마음이 타들어갈 것 같은 까투리. 불길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장면들이지만 온 산 전체에 악마의 혓바닥처럼 넘실대는 불길을 본 뒤라 산불이 얼마나 굉장한지, 또 까투리네에게 닥쳐 온 위급함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느껴진다. 아울러 사실적으로 불을 그리지 않은 것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까투리의 마음만을 따라가며 몰입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아이들은 ‘애기 한 마리가 넘어졌다, 엄마가 무지 놀란 것 같다, 애기 업으면 빨리 도망 못 간다’며 안타까워한다.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에미는 저도 모르게 날아오른다. 이 대목에서 보연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한다.
“어, 애기들 어떻게 해! 근데 선생님, 엄마가 날라 갔다가 새끼들 생각나서 다시 날아 올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 표정을 살핀다. 저만치 날아갔던 까투리는 새끼들을 두고 온 것을 알고 황급히 몸을 되돌린다. 그렇게 몇 번을 날아올랐던 까투리는 결국 새끼들 곁에 남는다. 내 한 목숨 살겠다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에미를 부르는 새끼들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새끼들이 젖은 날개를 털며 비린내 풍기며 제 품에 기어들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에미는 품속에 새끼들을 넣고 날개를 꼭꼭 오므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에미를 덮치는 불길. 혼자 된 에미의 힘으로 어찌 그 험한 불길을 이길 수 있겠는가? 산불이 꺼진 장면에 그려진 새까만 나무 등걸들. 그 나무처럼 새까맣게 탔을 에미의 마음이 그려져 글을 읽는데 자꾸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삶은 죽음을 거쳐 온전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에미의 죽음은 아홉 까투리의 몸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까맣게 타들어간 숲에서 박서방아저씨가 발견한 것은 죽음으로 얻은 빛나는 생명이다. 그러니 죽은 까투리의 몸이 그토록 찬란한 빛깔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 까투리 몸 색깔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에서 ‘엄마는 죽어도 새끼가 커서 엄마가 되고, 또 새끼 낳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안 슬퍼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보연이 말처럼 까투리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직관으로 이야기를 읽어내는 아이들의 눈이 날카롭다. 역시 우리 반 아이들은 내 스승이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내면을 읽는 데 문득 우리 집 막내 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권정생선생님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돌아가셔서 이젠 못 보네. 참 속상해!”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기도를 드리던 모습. 그러나 비록 선생님은 곁에 없지만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까투리처럼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글로 영원히 우리 목숨 안에 존재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불속에서도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엄마 까투리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새끼들을 살린 까투리가 죽은 뒤 내리는 비를 인상적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거쳐 온전해지는 삶의 순환성을 무의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 까투리가 죽어서 슬프지만 새끼들이 또 새끼를 낳아서 엄마가 되니까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