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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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자아가 두 개로 쪼개진 금고 기술자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가 사는 지역의 하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소재를 전자는 파편화된 서사로, 후자는 역사적, 사회학적, 풍자적 맥락으로 구성하며 행간을 오가는데, 이게 기묘하다.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현실의 몇몇 일들이 연상될 정도로 구체적이니 뭐라 반박하기도 어렵고, 거기에 (쓴)웃음 짓는 사이에 서사는 조금씩 진전되니, 계속 읽을 수밖에.

뇌졸중으로 주인공은 왼쪽 몸만 살아남는다. 단점이 너무 크지만 장점도 있다. 기억력이 증대되고, 프랑스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육체적인 활동을 하면 좋아질 거라는 의사의 충고대로 그는 퇴원 후 공장으로 출퇴근하면서 하천을 거니는데, (불가해한 사건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천변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투사한다.

소설은 바람을 피우고도 뻔뻔하게 구는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하더니, 뒤에서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기에 이른다. 그의 고백은 내밀한 고백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비릿함을 제거한 고깃덩어리를 보여주는 것처럼 냉정하다.

그는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카롤린이라는 여자를 화마에 휩싸인 숲에 두고 도망갔으며, 금고 제작 일을 하기 전까지 도둑질을 일삼았고, 장모가 살해되는 일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떤 젊은이의 금고 내부를 도둑질해 거기서 빼낸 부동산 정보로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놓고 보면 그가 자신의 죄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다가 뇌졸중이라는 신의 심판을 받은 거구나, 하고 이야기가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금고 기술자처럼 표현하자면 조물주가 ‘그’라는 이름의 금고(뇌)에 심어둔 기폭장치를 작동시킨 것이라고. 신은 그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영원히 반복되는 듯한 10키로미터의 하천을 끊임없이 걸으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아내를 의심하며 자신이 만든 두 개의 금고(러시아인형처럼 하나가 하나의 안에 있는 구조)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아내에게 제공할까를 고민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서둘러 소진하도록 결정한 것이라고. 마치 시시포스에게 부과한 운명 같다. 그보다는 좀 더 시시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가 신의 심판으로 ‘쪼개진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봐야 한다. 그리고 그가 쪼개져 왼편을 차지한 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그가 집에 만들어 둔 금고, 아내가 그토록 열고 싶어 집착하는 금고(그녀는 금고가 하나뿐인 줄 안다)를 두고 그는 그 안에 심어둔 기폭장치를 발동시킬지, 유언장과 이혼신고서 중 무엇을 온전하게 둘 것인지 등을 고민한다. 그런데 그 고민은 신이 아니고서야 감히 할 수 없는 고민처럼 보인다. 그가 그 안에 남겨둔 종이 쪼가리와 다이아 반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질 아내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사위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게 더 값어치 있을지, 어떤 선택을 해야 그녀가 후회할지, 그녀가 자신 없이도 이 재산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지, 어떻게 해야 이 생활이 더 윤택해질지 하여튼 별걸 다 고민하는데, 아내는 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다. 신이 인간을 두고 하는 게 이런 놀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아내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여태껏 저질렀던 죄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선택-그 중 죄악에 속할 만한 것들을 오른쪽의 몸에 쉥거, 자신에게 복수할 거라던 친구의 이름을 투영해서 은근슬쩍 떠넘기려고 한다. 그렇게 현실의 모든 짐을 벗어 던지려는 그의 의도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현실에 대해 어떤 책임도 떠맡지 않으려는 신처럼 보인다.

나는 그 신의 이름이 ‘선’이라고 의심된다. 만일 내면의 악이 깨끗이 분리되기만 하면 그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에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어서 결코 구분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찾아든 뇌졸중은 그의 자아를 둘로 쪼개지게 했다. 하나가 둘로 쪼개짐으로써 최소한의 판가름 기준이 생겼고, 그는 임의로 한쪽을 선의 영역에, 다른 쪽을 악의 영역에 둘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과 악에 좀 더 유식해졌을 뿐이다. 그 쪼개진 둘이 모여야 ‘그’를 이룬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쪼개진 둘이 한데 모인 육체가 비록 게다리 걸음일지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신을 흉내 내는 인간이며, 지킬과 하이드 같은 이중인격이 아니라, 동시이중인격인 것이다.

하지만 천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소녀(그는 소녀에게 카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그의 죄를 또렷하게 상기시킨다. 죽은 줄 알았던 죄가, 기억 속에 남은 줄만 알았던 죄가 살아움직이는 걸 또렷이 본 것이다. 그것도 그의 삶 주위에서.
그는 그녀를 위한 금고를 만듦으로써 속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몸은 온전치 못하고, 그나마 믿을 만한 후임 아마드에게 맡겨보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금고 제작을 포기한다.
그는 결국 직접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녀(속죄)를 향한 그의 때늦은 갈구. 온 생의 비루함을 떨쳐내고 천국의 문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몸부림. 하지만 그녀가 그를 피해 하천을 건너버림으로써, 또 그가 하천에 처박혀 척추마저 손상되어 식물인간이 됨으로써 제대로 실패하고 만다.
실패 후 쉥거는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아내마저도 그를 방문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지만 그의 몸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는 모든 감각을 또렷이 느끼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죽은 뒤에도 그의 혼은 전과 마찬가지로 쉥거와 아내에 대한 미련을 보인다. 하지만 자기가 죽었음을 상기하고는 생의 모든 미련을 버리게 된다.
비로소 죽음이 그를 악이 제거된 선의 영혼으로,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제 무덤 주위를 떠돌고 있는 이 신은 그저 유령 같기도 하다.

ps. 선과 악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뿐이지 이 소설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정말 많다. 하천의 상징적 의미와 상류와 하류의 구분, 죽음에 대한 사유, 금고에 집착하는 이유 등등… 그것을 하나로 아울러 말할 수 없음이 이 작품의 깊이와 의미를 보증하는 것 같다.
(현대문학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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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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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오던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재난은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웅장하고 범상치 않게 등장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그림자에 슬며시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 거라고
그렇게 장악하는 거라고
뉴스를 보며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었다

신종 변이, 40도가 웃도는 기온, 해수면 상승, 뜨거운 태풍, 국지전, 새로운 정부 등이 세계를 이루는, 현재도, 그렇다고 완전한 미래도 아닌 이장욱의 세계에서 연과 천은 각자 모수와 한나를 회상하며 끊임없이 뒷걸음질 친다. 기록하는 모수와 연기하는 천, 중얼거리는 연과 혼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나. 그들이 모인 무도의 해변여관. 나아가지 않는 이야기, 닫혀버린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유령처럼 떠돈다. 누군가의 말이 다른 누군가의 말로 뒤바뀌는 돌림노래 같은 중얼거림을 듣다보면 나도 그들을 따라서 중얼거리게 된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가자고. 떠난 이들과 남겨진 이들, 그리고 사라지는 이들이 남기는 쓸쓸함이 바닷바람처럼 코끝으로 몰려온다. 그걸 맡으니 뭐든 상관없어진다.

인물들을 느리게 조망하는 시선이 마지막에 이르러 뜨겁고 황량한 바다를 향하는 순간, 나도 거기서 조용히 그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다가 아닌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이야기. 생성이 아닌 침잠의 이야기. 생성되다가도 어느 순간 침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재난 이후가 아닌 그들의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해야만 한다.

뒤에 실린 양윤의 평론가의 해설이 신비롭다. 실수와 허수의 개념으로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이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수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적혀 있다. 시간이란 허수의 차원이구나 하는 깨달음. 허수처럼 살게 되는, 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고 싶다. 세상은 비워지더라도 결국에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로 다시금 차오른다.

*현대문학으로부터 책을 제공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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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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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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