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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단편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5년 8월
평점 :
버지니아 울프가 평생 써온 단편의 절반 가량(스물세 편)이 실린 단편집. 머릿속 장기적인 독서 계획에 따르면 <올랜도>를 읽고 <파도>를 읽어야 순서가 맞는데, 얼마 전에 출간된 이 책이 선수를 쳤다.
단편들 대다수가 분량이 짧아 간식 집어먹듯이 하나씩 하나씩 읽으며 느낀 바로는, 장편의 미학과 단편의 미학은 엄연히 다르지만 버지니아 울프에게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해 선행되어야 했던, 무엇이든 적어볼 수 있는 소설 실험실이었던 것 같다.
해설에 안내된 대로 초기작(<벽 위의 자국>~<과수원에서>(1917~1921)), 중기작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시리즈(<본드가의 댈러웨이 부인>~<요약>(1922~1925)), 후기작(<존재의 순간: 슬레이터네 핀은 뾰족하지 않아>~<유산>(1926~1941))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실험과 시도가 안착과 정립으로, 그리고 인물과 주제의 깊이로 변화하는 게 보여서(지금은 독자에 불과한 내가 감히 말하자면) 한 작가의 성장을 볼 수가 있다.
초반에 실린 단편들은 의식의 흐름과 인상주의적인 기법을 실험한 이야기들이 많다. 생각한 거보다 어려워서 애를 먹은 소설도 있고, 읽었지만 무엇을 느끼면 될지 헷갈리는 소설도 있고, 이런 톤으로 이야기를 쓰기도 했구나 놀랐던 소설도 있다.
<큐 식물원> 같은 경우 식물원을 거니는 여러 커플을 보여주면서 해의 기울기, 식물의 색깔, 달팽이의 움직임 등을 같이 제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인물들을 보았다가 식물들을 보았다가 하는 식으로 이어져서 이 시간 이 장소 자체를 담아내려 했던 게 느껴진다(그게 후에 장편들에서 런던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어떤 모임>의 경우 이중에서 제일 쉽게 읽히고 또 강렬한 풍자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세상을 사람으로 채우고) 남자는 책과 그림을 낳는다(세상을 문명화한다)는 당시의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여성혐오)에 대해, 읽을 줄 아는 여성들의 모임에서 의문이 제기되어 남자들이 정말로 문명화된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제각기 분야에 침투해 대단하다는 남성들을 관찰하고 이따금 다같이 모여서 평가를 내려보기로 합의한다. 한 명 한 명 가서 보고온 것들을 발표할 때 고도의 돌려깎기가 폭소를 일으키지만, 모임 도중 전쟁이 나며 다들 흩어지게 되는 부분은 무섭고 안타깝다. 문명화의 결말이 전쟁이었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 당시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던 ‘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였다. <밖에서 본 여자 대학교>도 가부장, 대학의 규율로 구속받는 여성들의 현실과 그럼에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를 논하는 소설이었다(전개 자체가 좀 어렵긴 했다만).
<월요일 또는 화요일>, <푸른색과 초록색>, <과수원에서>는 오감을 발동해서 읽어야 겨우 읽을 수 있는 시적이지만 무척 어려운 소설이었다. <쓰지 않은 소설>, <현악 사중주>도 앞의 소설들에 비하면 서사가 주어져서 그나마 낫지만 어디로 초점이 옮겨갔는지 파악하기 꽤 어려운 소설이었다.
중기작부터는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 장편인 <댈러웨이 부인>과 연관되는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시리즈가 이어진다. <댈러웨이 부인>이 상류층인 ’댈러웨이 부인‘과 전쟁 후 트라우마로 환각에 시달리는 ‘셉티머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쟁의 상흔(죽음)과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생)가 서로 대조되는 동시에 서로를 연결하는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이 단편 시리즈들은 파티의 주최자인 댈러웨이 부인과는 정반대 입장인, 파티에 참여했으나 파티장에서 겉도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난 이쪽 인물들이 더 공감이 잘 된다).
겉도는 인물들이 발코니나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다 서로의 비슷한 점을 발견하지만 그때문에 서로 멀어지는, 아이러니한 결렬의 순간을 섬세하고 긴장감 있고 밀도 있는 심리 묘사와 압축적인 서사로 구현하고 있다. 대다수 주인공이 결혼하지 않은-당시 사회적 기준에 따르면-실패한 중년 여성이지만 그들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가 빛나는 진실된 순간을 포착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가 뒷받침해주는 작지만 단단한 진실들은 파티에서 겉도는 남성인물의 개입으로 무너지거나 흐려지거나 가려지고 만다.
중기작부터는 내가 알던 버지니아 울프의 필력이 온전히 느껴지기도 하고, 짧은 분량에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적으로 서사를 제시해서 전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장편 <댈러웨이 부인>과 이 파티 시리즈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상상을 하면서 읽으니 울프가 그려내려했던 파티를 종합적으로 음미해볼 수 있었다.
서로 간에 결이 너무 달랐던 초기작처럼 후기작도 저마다 결이 다르게 읽히는데, 초기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완성형 이야기처럼 인물과 서사, 장면의 구성, 주제의식이 더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존재의 순간: 슬레이터네 핀은 뾰족하지 않아>와 <거울 속의 여인: 하나의 상>은 동경하는 여성 인물의 이면을 포착하며 인물의 깊이를 탐색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전자는 그 탐색이 성공하지만 후자는 그 탐색이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정반대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공작 부인과 보석상>과 <유산>은 통속적인 이야기처럼 적혀 있어서 울프가 이런 소설도 쓸 줄 알았구나 싶게 한다. <사냥꾼들>은 남성 지주가 무자비한 꿩사냥을 치르고 여성 인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야기로, 남성의 잔혹성을 부각한다. <래핀과 래피노바>는 결혼하여 부부가 된 두 인물이 판타지적인 토끼 세계관을 구상하면서 서로 결속되다 와해되는, 환상성이 가미된 이야기였다(아직 읽지 않았지만 <올랜도>의 환상적인 상상력의 기질이 이런 게 아닐까 예측해본다). <탐조등>은 이야기꾼 같은 화법을 통해 증조부의 소년 시절을 아름다운 화폭처럼 그려내는, 장편 <등대로>의 아름다움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려운 작가가 맞지만 일부러 어렵게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가 말해야 하는 것들이,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유예하고 역행하고 때론 초월하며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를테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머금고서 타인과 거리와 삶을 경험하고 느끼고 사유하는 다면체적인 인간-이다보니 그렇게 어려워진 거다. 이 단편집을 보면 울프가 어려운 이야기만 쓴 작가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여러 연습과 시도, 사유를 통해 걸작을 써낼 수 있었다는 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