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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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블랙유머의 대가인 커트 보니것의 대표작 <제5도살장>(1969년)에서 전매특허처럼 반복되던 경구는 ‘뭐 그런 거지’였다(오래전에 읽은 터라 그것말고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어떤 뚱보가 숲속을 헤맸던 것, 어떤 행성의 동물원에서 인간이 전시된 것까진 기억난다). 전쟁통에 무자비하게 일어나는 죽음 앞에서 읊조리는 ‘뭐 그런 거지.’는 쿨함과 풍자가 모두 담긴 문구였다. 이번 장편소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1973년)에서 반복되는 경구는 ‘어쩌고저쩌고’다.
어쩌고저쩌고.

할말이 많지만 줄여야 할 때, 앞선 그 모든 할말들이 어떤 위력을 점점 잃어가는 걸 본인이 느낄 때, 그러니까 과잉될 때 쓰는 경구인데, 왜 그런 경구를 쓰느냐면 이 소설은 미국, 정확히 말해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확실히 과잉된 나라다. 과잉, 팽창의 대표가 아닐 수 없다. 이백년의 짧은 역사를 거치며 세계 최강국에 선 미국. 이민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인종차별이 여전하며 국가 원수의 한마디면 모든 나라 사람들을 휘청이게 만들 수 있는 나라 미국.

이 소설은 그런 나라의, 미들랜드 시티라는 지역에서 아트 페스티벌을 앞둔 어느 날 두 중년 남자가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다. 소설 막바지에 두 남자는 우연히 만나는데 거기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가 들고 온 소설을 읽고 그만 미쳐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미치는 남자는 거기서 자동차 대리점을 비롯해 여러 브랜드에 지분을 갖고 있는 부자 ‘드웨인 후버’(아내는 음독자살을 했고 아들 버니는 동성애자라며 상종도 하지 않는다)고, 미치게 만드는 남자는 장편소설은 117편, 단편소설은 2천편 넘게 썼지만 대다수 포르노 잡지에 실리는(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수당도 받지 못했다) 무명 sf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후에 노벨의학상을 받긴 한다. 그는 세 번의 이혼을 겪었고 그의 아들은 베트콩이 되었다)다. 소설은 그 둘이 만날 거라고 서두부터 예언하고 그들이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병렬로 제시하며 천천히 따라간다. 그러니까 작가가 결말을 미리 정해두고 독자에게 선포한 뒤 그 과정에 집중한 셈인데, 뜻밖에도, 결말에서 작가는 무언갈 깨닫고 서술의 방향을 바꾼다.

이 소설은 인간은 기계다, 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인간을 생명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의해 작동하는 사물(그런 점에서 결함 있는, 나사 빠진 인물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로 본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구에서 생각이란 우정 또는 적대감의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생각인지는 상관없었다. 서로 친구인 사람들은 친근감을 표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동의했다. 서로 적인 사람들은 적대감을 표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지구인들이 지닌 생각은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차피 생각들을 어찌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그저 증표나 다름없었다.” (p.51)

그런 독특한 관점은 이 소설 서술자의 ‘행성적 사고’(방금 내가 지었다)와도 맞아떨어진다. 마치 우주선으로 우주를 유랑하다 지구를 본 이들에게 지구라는 행성의 미국이란 국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소개하듯이, 흔히 알려진 단어로 명쾌하게 지시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지구인이 아니어도 알 수 있게 에둘러서 표현한다. 그리고 대뜸 소설의 전개완 전혀 상관없는 일러스트를 보여주며(이를테면 어떤 인물이 셔츠깃에 단 배지를 일러스트로 보여주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예술을 후원합시다.’) 시종일관 다른 길로 샌다. 그러면서 드웨인과 트라우트의 만남은 지연되고 지연되는데, 지연되는 풍경 속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것들이 점차 드러난다.

바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개념이다. 보니것은 이것을 종교적으로 다루지 않고 아주 물리적으로 다룬다. 인간을 기계로 보듯이. 트라우트는 소설가라는 점(그가 쓴 소설, 쓸 소설이 열 편 정도 소개된다)에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드웨인의 비서이자 정부인 ‘프랜신 페프코’가 부탁한 것처럼 치킨 체인점 하나는 거뜬히 사서 차릴 수 있고, 아버지의 암 치료비 때문에 드웨인이 소유한 “버거 셰프”에서 일하고 있는 ‘패티 킨’의 삶을 구제할 수 있는 드웨인도 창조자(생계의 창조자랄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드웨인의 머릿속에 다이너마이트처럼 심긴 아주 나쁜 생각이 발현되게끔 그의 앞에 아주 우연히 나타나서는, 우주 창조주가 당신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실험 중이며 나머지 인간은 다 로봇임을 주장하는 소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트라우트의 대표작)를 제공해 드웨인의 광기를 폭발시킨 트라우트에 비하면 드웨인은 피조물에 가깝다. 하지만 트라우트도 후반부에 이르러 커트 보니것 본인이 직접 등장하며 피조물인 걸로 판명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보니것 자신도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세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며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만큼, 그 또한 창조자라 보기 어렵다.

창조자 같은 누군가도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창조자 위에 또다른 창조자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복잡다단하다. 이 소설에서 꼬집는 부분은 이런 복잡성, 과잉이다.

인간들 또한 지구에서 마음대로 이것저것 만들어내고 찍어낸다는 점에서 창조자다. 버리고 태우고 방치하고 오염시킨다는 점에서도 창조자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는 인간은 피조물, 즉 기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연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창조자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창조자는 언젠가 이 모든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모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드웨인이 자동차 공장에 들렀다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차에 해서는 안 되는 모든 짓”(p.226)을 차에다 하던 실험실 앞에 붙은 ‘파괴 시험’이란 표시를 회상하며 내뱉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게 하느님이 나를 지구에 태어나게 한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인간이 망가지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말이야.“
(p.227)

그러니까 인간은 실험 대상이고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한 실험인 셈이다. 인간이 얼마나 이 지구에서 버틸 수 있는지가 이 실험의 주된 목적인데, 인간은 그 실험을 역으로 지구에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장 폐수를 강에 흘려보내고, 우림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자기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이 자신을 살게 해주고 있다는 걸 아예 잊어먹은 것처럼 말이다.

실험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실험하는 구조, 즉 핍박의 연쇄는 지구와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또한 인간을 핍박한다. 인간이 인간을 실험하는 노예제도가 그렇다. 소설 내에 만연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태들,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은 남북전쟁이 끝나며 노예 해방이 이뤄졌지만 승리한 북부 백인들에게 그건 좌절감이었을 거라는 풍자적 발언과도 맞아떨어진다. 여전히 흑인은 노예처럼 하급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어떤 일은 기계(로보-매직 세탁기 같은)가 대신하게 되었지만 흑인 노예가 하던 것처럼 완전한 대체는 아니어서 여성들이 일명 ‘깜둥이 일’을 떠맡게 되었다. 남자들은 기계를 계속 부수고 부수며, 더 나은 기계를 기다리며, 핍박은 계속된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세상이라 그런가 미들랜드 시티 사람들은 드웨인이 점점 미쳐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피아를 식별하기 위한 동조일 뿐이다. 그곳에서 벌어질 아트 페스티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두 남자가 기다리는 유일한 구원이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드웨인은 페스티벌에 찾아온 예술가들한테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그래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아트 페스티벌에 초대받은 예술가 트라우트는 불행하고 실패한 예술가인 자신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그들 때문에 페스티벌은 좌절되지만.

소설은 두 주인공이 아수라장인 세상을 관찰하며 소모되듯 너덜너덜해지던 와중, 작가 본인이 그들이 모인 홀리데이 인 칵테일라운지에 등장해서는 인물들을 도구적으로 써온 것(마치 미국에서 총알 한 방이면 누군갈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듯이)을 반성하며 이젠 ‘인생’을 쓰겠다는 신념과 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대신 혼돈 자체를 쓰겠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마치 피조물들의 세상에서 창조주가 떡하니 나타나는 것처럼), 난 작가 본인이 드웨인과 트라우트가 결합된 인물로 보였다. 소설 내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보니것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했으며, 어머니를 자살로 잃었고(평안을.), 고백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니까. 그는 자신을 둘로 분열해 한쪽은 광기로 들어찬 마을을 돌아보고 한쪽은 뉴욕에서 서부로 오는 여정으로 미국을 돌아보며 이 세상의 모양, 이 모양 이 꼴을 보여준 것이다. 그 둘이 만났을 때 광기에 불이 붙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런 세상을 보고도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니까. 물론 그 광기는 무자비한 폭력, 누구도 변호할 수 없는 폭력으로 벌어졌으며, 폭력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던 소설이 드웨인에게 준 그릇된 깨달음은 ‘세상에 무수히 일어나는 부끄러운 일들이 타인들, 기계들이 벌인 건데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였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결국 아트 페스티벌을 중단시키고 만다. 모든 실험이 망해버린 것이다. 예술이라는 새로운 진리의 실험마저도.

그러나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드웨인의 광기에 불이 붙기 전, 보니것은 칵테일라운지에 자신이 등장시킨 미니멀리스트 화가 ‘카라베키안’, <성 안토니오의 유혹>이란 아주 단순해 보이는 그림을 이 도시에 팔아 거액의 돈을 벌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하는 그 화가가, 혼돈의 미들랜드 시티에서 유일한 자랑거리, 미들랜드 시티에 살아가는 사람들한테서 삶이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여성 수영선수 ‘매리 앨리스 밀러’를 그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수영 훈련을 시켰다는 얘길 듣고 평가절하 하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한테서 예술가로서 욕을 먹게 된 순간, 그가 예의를 갖춰 자신의 그림이 가진 의미를 고백한 걸 듣고 감화된다. 그 말은 이러하다.

“이제 저의 명예를 결고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의 도시가 소유한 그 그림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의식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비물질적인 핵심-모든 메시지를 수신하는 '나 자신'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쥐와 사슴과 칵테일 웨이트리스의 내면에도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그 어떤 터무니없는 모험이 닥쳐오든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성스러운 그림은 수직으로 된, 흔들림 없는 하나의 빛줄기입니다. 만일 바퀴벌레나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그의 옆에 있었다면 그 그림은 두 개의 빛줄기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며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성스러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기계에 불과합니다.”(p.299)

내면에 의식을 갖고 살아있는 것,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그 얘기를 자신의 피조물한테서 들은 창조주 보니것은 그 자신이 표현하려던 혼돈에 잠식되지 않고 평화로운 지구인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후에 드웨인의 폭력은 막지 못하더라도(그는 이미 제대로 미치고 있어서 화가의 고백은 듣지도 않았다. 그후 그는 몰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우트 앞에 나타나서는 트라우트를 해방시켜주고 떠난다.

“저는 다가올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세월을 위해 저 자신을 씻어내며 갱신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정신적 상황에서 톨스토이 백작은 자신의 농노를 해방시켜줬지요.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켜줬습니다. 저는 제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제게 그토록 충성스럽게 봉사한 모든 등장인물을 자유로이 풀어주려 합니다.
저는 당신한테만 이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오늘밤은 다른 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밤이 될 거예요. 일어나세요, 트라우트 씨, 당신은 자유입니다, 당신은 자유예요."
그가 꾸물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이 부상당한 상태였기에 우리의 손은 각자의 몸 양옆에서 달랑거리기만 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내가 말했다. 그리고 사라졌다.(p.395~396)

나는 이것이 보니것이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 중 하나에게 고하는 작별로 들렸다. 또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욕망하던 무언가의 개별성, 독립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으로도 들렸다(그 점에서 드웨인과 이름이 아주 비슷한, 교도소에서 풀려나 자동차 대리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스물여섯살의 흑인, 아주 웃기고 유쾌한 ‘웨인 후블러’는 드웨인과 반대로 자유를 찾은 듯 느껴진다).

우리가 이 파괴 시험(누구를, 무엇을 파괴하는 건지 이제 아리까리해진)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를) 무언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렇게 평화로운 지구인이 되는 것. 올해의 사나운 여름이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평안한 여름 같았다. 평안한 여름을 느끼고 싶다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를 꼭 드셔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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