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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첫 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화양극장>이나 <김일성이 죽던 해>, <오즈>의 근사함도 있지만 <언두>와 <OK, Boomer>,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어긋남과 표독스러움도 있었다.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무언가는 굉장히 사랑할 수 있듯이, 사실 그게 인간이듯이, 소설에는 인간의 선하려는 의지와 쉽사리 악으로 닿는 마음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번 작품집은 표독스러움에 더 날을 세워 마치 날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야기라는 먹잇감을 채가는 것처럼 전개한다. 이야기의 장악력이 한결 강해졌고 거기에 속도감까지 더해졌다.
첫번째 소설집을 묶는 단어가 세대였다면 두번째 소설집은-세대를 포함하는-사랑과 닮음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은 대부분 사랑에서 기원한다. 애정. 유의할 점은 사랑이 윤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랑들은 처음엔 윤리의 범주에 있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윤리를 벗어난다. <길티 클럽: 호랑이 키우기>의 화자가 아동학대를 한 김곤 감독을 변호하게 되는 부분과,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의 의견보다 앞서서 인간의 희망을 이용하려는 부분, <혼모노>에서 장수할멈이 깃든 신애기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신애기를 넘어서려고 피를 흘리면서도 작두를 타는 무당 문수가 그렇다. 그들은 그게 그 순간엔 유일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잘못됐다는 걸, 도가 지나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은 후에 온다. 혹은 오지 않거나.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광기라고 애써 포장하고 거리감을 부여하려 해도, 우리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씨앗은 사랑이며, 인간 누구에게나 그런 씨앗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누구나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정하는 대상을 닮으려 애쓰다 그 대상을 넘어서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잉태기>처럼 닮지 않으려고 애쓰다 닮아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윤리를 벗어난 사랑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똑같이 광기로 보인다고 알려주고 있다. 딸 서진을 원정출산을 보내려는 엄마서희와 범죄라며 뜯어말리는 시부 지중헌(두 이름 모두 소설에 나오진 않지만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밝히셨다)은 극명한 대비에 놓여있는 듯하지만, 서진을 향한 애정의 크기는 똑같다. 방향만 다를 뿐. 서진을 가졌을 때부터 시부의 온갖 간섭을 받았던 화자 서희는 시부를 극도로 경계하는 방식으로 서진을 돌본다. 시부는 아이 때부터 아꼈던 서진이 아이를 갖게 되자 서희의 영역 밖에서 서진을 챙기려 한다. 엄마의 방식과 할아버지(별명이 지지)의 방식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던 서진은 그들이 갈등하게 되면서 자신도 갈등하게 된다. 결국 서희와 시부가 추구하는 사랑의 인력이 날이갈수록 세지면서 서진을 있어야 할 자리, 있고 싶은 자리에서 끌어내고 만다. 끝끝내 이 가족의 자장에서 서진은 없어지고 엄마와 시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사랑의 열감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이 흉악하다.
사랑의 광기는 악이 되기도 쉽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에서 여재화와 구보승이 설계하는 건축물은 수련원으로 불리지만 실은 고문실이다. 여재화는 건축계에서 살아남고자 이 일을 받아들이고 건축학과 학생인 구보승, 성실하긴 하지만 욕심 없어 보이던 그를 조수로 데려온다. 여재화가 이곳이 그냥 수련원이 아니라 고문실이라는 걸 밝히고서부터 구보승이 열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서늘하면서도 흥미롭다(나치 수용소의 설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여재화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는데 구보승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위치를 헷갈리게 만들고 천장을 높게 만들어 다른 취조실의 비명이 울리도록 한다. 특히 취조실에 창문 넣는 걸 반대했던 구보승이, 거기에 대고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하다며 반대했던 여재화의 의견을 다르게 받아들여, 하루에 아주 짧은 순간만 빛이 들 수 있는 수직창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소름 돋는다. 여재화는 구보승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막지 않고 설계자를 구보승으로 올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어쩌면 구보승보다도 인간을 위한 건축이 뭔지 알았던 여재화가 더 악한 걸지도 모른다(줄곧 여재화의 시점에서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구보승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때 여재화가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인간의 양면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여재화는 그의 선배 Y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여재화가 욕심없고 순한 놈이었다고 말하자 놀란다. 자신이 구보승을 조수로 데려온 이유도 그런 욕심 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위픽에서 나왔던 중편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도 건축이 소재라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인간을 위한 건축을-그러나 상반된 관점으로-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재화가 제자인 구보승이 자기와 닮았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 것과 반대로 <우호적 감정>의 수잔, 스타트업에서 시니어급인 그녀는 주니어급인 동료 알렉스가 사회초년생 시절 열정 넘치던 자신과 닮았다는 걸 바로 안다. 대표인 맥스보다 나이가 한참 많고 뒤늦게 스카웃 되어 팀에 잘 섞이지 못하는 시니어급 동료 진을 포용하려고 애쓰는 알렉스를 보며 동료 수잔은 자신도 사회초년생 때 모두를 포용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그 말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진은 스타트업의 규칙을 저버리는 발언을 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수잔은 회사를 관둔다. 알렉스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부장이었던 진이 수잔이 나간 뒤의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하는 모습과 거기에 최대한 맞춰주려는 대표 맥스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수잔이 느꼈던 감각들이 이제 알렉스에게도 찾아올 거라는 징조처럼 보인다.
발표 시기상으로 가장 마지막인 <스무드>는 닮음에 있어 다른 소설들과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인 듀이와 태극기 부대원인 미스터 김은 서로를 보며 각자의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정을 붙인다. 게다가 그 정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관심, 반성으로까지 뻗어가는데… 서로 너무 다른데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깨끗하게 화합하는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낯선데, 독자인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빠진 상태에서 너무 다른 지점에 놓인 인물들의 매끈한 연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이해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오독도 정독도 필요한 듯이 느껴진다. 오독도 정독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소설이다. 그래서 독특하다.
마지막에 실린 <메탈>도 닮음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서정적이기도 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학교 동아리에서 메탈음악으로 맺어지고 컨테이너 아지트에서 꽃 핀 시우, 조현, 우림의 ‘코발트’적인 우정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하는 과정은 닮음의 형태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애정하는 사람만이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모습은 뭉클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어떤 열정은 길어지다보면 고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집 같은 열정마저 사라지면 헛헛함에 삶의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지니 일단 계속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림의 메탈에 대한 애정은 열정이었을까 고집이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또. 십대의 우정이란 타임캡슐 같다. 인상적인 순간과 장면들에 더불어 미래에 꺼내볼 많은 약속들이 거기에 있다. 우림이 마지막에 조현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때의 타임캡슐을 찾아 땅을 파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녹슬었더라도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성격이 워낙 다른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이 작가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독자로서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