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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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의 시들은 개인의 세계로 침참하는 시들, 그것이 깊이로 느껴지기 전에 벽으로 느껴지는 난해한 시들과 달리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세계를 소개하듯이 경유해 개인의 영역을 넓히는 시처럼 느껴진다. 시가 막힘 없이 읽힐 정도로 직관적이고, 상징이나 비유도 복잡하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시에서 발견하고 대화하며 투영되는 존재들이 비인간, 낯설지만 이미 ‘있어왔던’ 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적이다. 시는 유려한 문장을 쏟아붓는 미지의 매혹이 아니라 귀한 발견의 순간이 정제된 언어로 전개되어, 읽는 나를 넓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은 제목에 ‘물질’이 붙어있고 시 안에도 <세계 끝의 버섯>,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말 등 과학적 인용이 많은 학술적인 시집이다. 시라는 주관성의 세계에 과학의 객관성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 같다. 그렇다고 시가 객관적 설명으로 채워지면서 딱딱해지는 건 아니다. 물질이 갖고 있는 특성-세상에 널려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만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희덕의 시는 과학의 한계와 시의 한계를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파괴적인 힘이 기술과 자본으로 포장되기 쉬운 과학의 속성과, 아름다운 암호로 물러나기 쉬운 시의 속성을 보완한다.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를 상호이익을 위한 공생 관계라 정의한 진화생물학자의 말을 의심하며 그 관계가 사랑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모습, 피와 석유가 포르피린이라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고 말하는 시, 담수가 선진국이 포진한 북반구로 끌어올려지면서 남반구에 기후문제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 기후위기를 알리기 위해 가져와 전시한 빙하를 사람들이 마구 부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서늘하게 표현한 시, 아보카도 하나에 여러 국가들의 노동과 희생이 치러진다는 발견 같은 비판적인 시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물구나무 설 수 없는 내가 물구나무종임을 선언한 너를 찾아가는 <물구나무종>, 털이 벗겨진 닭과 맨 몸인 나를 서로 동등한 입장으로 사고하는 <닭과 나>는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에코 페미니즘적 관점이 묻어나는 시다. 인간이 물질을 사용하는 손을 지상에 닿는 뿌리로 변화시키는 물구나무라는 비유가 독특하다.

나에겐 3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계엄과 탄핵을 통해 공원에서 광장으로 복귀한 여의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이 저지른 참상, 히잡으로 일어난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 spc계열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호주의 원주민 동화정책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사과의 날, 돈을 갚는 은행과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자본주의로 엮이는 순간, 고독사가 존엄사로 이름이 뒤바뀌는 슬픈 순간, 한국전쟁 속에서 이념의 경계에 서게 되는 순간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고 있어서다. 특히 <조지 오웰의 장미>는 정치와 정원이 유사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인간 사회의 일이 인간 사회만의 일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해서 인상적이다.

4부를 읽으면서는 새로운 가능성과 여전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호주 시인 사만다 포크너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한국의 버섯괴 호주의 산호초가 하나로 엮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근사하고, 전동 휠체어 체험을 통해 인간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보게 하고 인간도 물질임을 역으로 느끼게 해서 놀랍다. 마지막에 실린 <손과 손으로>는 실뜨기를 통해 우리가 연결된 채로 서로 차례를 주고받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드러낸다.

이렇게 50여편의 시들, 세계와 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인간중심주의에 한정된 시적 대상을 비인간으로 넓히는 시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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