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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5 ㅣ 소설 보다
강보라.성해나.윤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3월
평점 :
여백을 선물하는 세 편의 소설들.
강보라의 <바우어의 정원>은 은화의 오디션 장면이나 정림, 무재의 삶이 몇 부분 비어 있고, 성해나의 <스무드>는 소설 속 예술가 ‘제프’의 작품 이름이지만 그 작품의 이야기가 아니며, 윤단의 <남은 여름>은 서현이 친구의 죽음과 전 직장에서의 고충에 부채감을 느끼는 이야기지만 친구의 삶과 전 직장 상사인 추팀장의 이야기, 서현의 직장 생활에 대해선 상당 부분 비어있다. 그렇게 비어 있는데도 소설은 알차다.
꽉 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비어 있는데도 알차고, 그 여백을 아쉬운 감상으로 남게 하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근사하게 안겨주는 소설들도 좋다고 느꼈다. 하나씩 짚어보자면,
<바우어의 정원>은 정원에서 초원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연기라는 형식의 거짓됨에 흥미를 느끼는데, 연기가 삶을 재구성해볼 수도 있게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좋았다. 또한 그들에게 배우가 정체성이자 직업이며 삶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초반에 제목의 의미가 제시되어 놀랐지만 뒤로갈수록 그 제목이 더욱 확장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아픔을 오래오래 소화하는 정림과 은화의 대화(혹은 대사)며, 마지막 장면의 참담함과 과거가 따라오는 묘사는 몇 번을 봐도 근사하다.
<스무드>는 재외동포 화자 ‘듀이’가 태극기 부대 집회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여기서 나-독자는 철저하게 외부인이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두 인물이 만나 화합을 이뤄내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내가 그들보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제프 쿤스의 매끈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질감과 익숙함과 닮아 있기도 하다). 갈등 없는 세상은 평화로울까? 그건 오히려 모두가 하나의 편인 전체주의적인 세상이 아닐까 싶다. 낯선 인물들의 익숙한 모습을 보면서 현대의 인간은 제각각의 밀실을 지닌 채 광장을 떠도는 건 아닐까 싶었다. 밀실은 너무나 커지는 반면 광장은 협소해지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또한 어떤 오해는 너무나 오해되면 이해에 가까워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해한 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 남은 여름>은 분위기와 밀도가 빛나는 소설이었다. 은근한 거리두기와 덤덤한 다정이 느껴지는 서술, 푸른 소파가 나타내는 상징-소파는 오로지 앉기 위해 만들어진 가구지만 동시에 눕거나 기대기 위한 가구이기도 한 것-이 여름의 적막감, 화자가 느끼는 부채감을 되려 강조한다. 송지현의 소설에서 느꼈던 여백의 미, 덜어냄의 미를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에게 남은 것들은 누군가가 떠나고 남겨진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 살아왔던 흔적을 빌려 살고 또 누군가에게 돌려준다고.
공교롭게도 소설 배경이 소설 순서대로 겨울, 여름, 여름이다보니 독자에게 봄이라는 여백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쓰는 자의 펜이 읽는 자의 펜으로 옮겨가는 연결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