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품절


건축학과 4학년인 ‘재서’가 문교수의 권유로 동기인 ‘이본’과 함께 경주에서 서머 스쿨에 참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경장편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마음 한 켠에 추억을 새기는 여름의 인상이 이번 소설에서도 진하게 이어진다. 그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야기에 나를 맡겨놓은 채 소설 속 풍경을 감상하듯이 읽었다.

건축학과로 전과해 교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본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과 질투, 시기심, 교수들에게 ‘숙제’가 되기 마련인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며 권정연 씨와 홍자애 씨, 문교수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재서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나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소설과 나의 거리가 분명함(국문과와 건축학과)에도 불구하고 나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처럼 빠져 읽었다.

이번 소설에 쓰인 건축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이다. 읽으면서 건축과 소설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이승우 작가님의 문장이 건축처럼 느껴졌던 것도 떠올랐고). 건축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해도 현실이라는 지반 위에 세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그만큼 세상과 밀접하다(문교수가 수업시간에 ‘캐드’ 프로그램 대신 제도용 연필로 등고선을 직접 그리게 한 것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소설도 상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거기서 세계관과 인물, 갈등과 구조를 설계하고 써나가야 제대로 지어질 수 있다. 그래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남지 않을 수 있다.

건축과 소설의 유사성은 오래된 고택을 두고 ‘개축’할 것이냐 ‘재건’할 것이냐 갈등하는 이 소설을-오래전부터 전해져왔으나 현재 위기에 처한 무언가를 개선할 것인지 아니면 버리고 새로 만들 것인지를 따져보는-예술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또 주목해야 하는 점은 거기서 누가 ‘살고 있다’는 것, 그러니 설계자가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면 안된다는 것, 그 타인의 삶을 두루 이해해야 개선방안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타인인 홍사애 씨와 권정연 씨는 몇 번의 지진을 겪고서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지 불안한 상황. 집을 살펴본 이본은 재건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화자도 갈팡질팡하다가 재건을 생각하지만, 문교수의 권유로 경주를 둘러보고 첨성대와 문화재들을 관람하며 그들은 조화, 건축 용어인 ‘차경’을 떠올린다. 문화재들이 천년, 즉 사람이 열 번을 나고 죽는 시간을 버티며 수많은 사람들을 이어주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세상과의 조화가 건축에서 중요하다는 걸(이 고택이 이곳 산내면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의 마음은 이제 개축으로 기운다.

여기까지는 막힘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소설의 후반부에서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분위기가 뒤바뀌나 싶었는데 그 뒤에 이웃들이 그들을 구해주고 서로 손잡으며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부분을 보며, 이 소설이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 ‘개축’하기로 하는 결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행위이자, 상상으로 현실을 보완하는 행위다. 그렇게 상상과 현실은 연결된다. 그러나 때론 현실 자체가 상상으로 보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게 휘청거리기도 한다. 집을 고치기도 전인데 또다시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건축이며 상상이며 전부 무용해질 것만 같은 그런 순간에, 그 어긋나는 세상에서 서로 손잡아주는 사람들(타인들)이 있다. 소설이 차근차근 전달하는 메시지-세상과 건축의 조화-는 소설의 말미에 타인과 나의 조화로 도약한다. 그렇게 건축의 인본주의는 소설의 인본주의와 이어지고 나는 타인과 세상과 이어진다. 그 지점이 감동적이었다.

소설에서 나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많이 느껴졌는데 최근 심각한 산불문제가 떠올라 착잡하기도 했다. 호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요즘 부쩍 산불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엉망이 줄어들고 모두가 덜 다치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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