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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2000년 초반, 젊었던 작가를 만난 적 있다. 국문과 학생도 아니면서 ‘국문인의 밤’ 행사에 기웃하며 먼발치에서 작가의 작은 목소리와 조우했다. 눌변에 가까운 말솜씨로 부끄럼 많은 소녀처럼 수줍게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던 작가. 글로만 만나며 머릿속에 그려오던 모습과 동떨어진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나는 달변가가 아닌 작가라 다행스러워했던 것 같다. 말을 버거워하는 천성이니 진심과 진력을 다해 글로 술술 풀어내겠구나. 그날로부터 조금 더 내 안으로 들어온 작가.
아버지에게 갔었어. 담담하지만 쉼 없는 호흡으로 아버지의 시간 그리고 아버지와의 시간을 한껏 펼쳐 놓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품을 떠나왔어도 저렇게 많은 시간을 아버지와 공유하며 추억을 한 겹 두 겹 쌓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가 자꾸만 부러워졌다. 그랬기에 ‘나’는 아버지가 영영 떠나시기 전 일생의 마지막 과업이라는 의무감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기록해 나갔으리라. 아버지를 생각하는 이 세상의 누구에게나 ‘아버지와의 시간이 너무 짧았어.’라는 아쉬움 되뇌이게 하며 깊고 넓은 그리움의 물꼬를 트는 시간. 아버지에게 갔었어.
작가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J시의 풍경 그리고 그 외곽에 위치한 ‘나’의 고향을 머릿속으로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광경과 친근한 분위기에 이끌려 나 또한 S시의 변방 중의 변방에 폭하니 안겨 있는 나의 고향을 떠올리게 되었다.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는 내가 거닐던 과거를 소환해 또 한 번의 그리움에 젖게 하는, 잊혀진 듯했던 시간을 선물처럼 쥐어 준다. ‘나’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듣기 시작했던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선가 ‘나’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나를, 종국에는 ‘나’를 몇 발자국 뒤에 두고 아버지를 향해 서둘러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묵묵한 아버지들에게 성큼 다가서는 시간. 덕분에 나도 요 며칠, 이젠 꿈에도 좀체 찾아오시지 않을 만큼 저 멀리에 계신 아버지에게 한참을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