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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5월
평점 :
과연 소문난 맛집이었다. 미오기네 곰국에는 다른 집과는 다른 맛들이 풍부했다. 일반 곰국이 아니었다. 미오기네 곰국은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의 오미(五味)가 다 느껴졌다. 나는 비법을 캐러 들어간 잠입 기자와 같이 꼼꼼하게 그녀를 탐색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내가 그녀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간과(看過)하고 넘어간 큰일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글은 화장을 하고 읽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오후 외출을 위해 오랜만에 치성을 다해 그려놓은 얼굴이 얼룩 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인기 절정의 푸바오같은 얼굴로 그녀가 차려준 곰국 한 권을 붙들고 앉아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비오는 날 미친 여자가 되어버렸다.
서평을
읽다가 울게 만드는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그래서 모니터나 휴대전화의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더 좋아하는 내가 종이책의 활자로 진즉부터 만나기를 고대했던 것이 미옥쌤의 곰국 시리즈였다.
“책 제목은 [미오기傳]이지만 시간순으로 쓴 글은 아니다. 말하자면 통증 지수가 높은 기억의 통각점들을 골라 쓴 점묘화다.”-프롤로그에서
시간 순의 전기문(傳記文)이었다면 미오기전은 선화(線畫)였을테지만 한 가지 색으로 색칠을 하고 그려진 선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오기전은 한 점, 한 점 아픔이 담긴 이야기들이 다양한 색을 머금고 찍혀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다양한 컬러의 크기가 다른 작은 점들에 불과하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미오기의 화사한 웃음이 담긴 멋진 초상화 한 점이 될 것이다.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아직 누가 볼 새라 마음 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아 놓은 서글펐던 날의 많은 기억을 밖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난 후에도 어려울지 모른다. 그런데 즉석 라면처럼 한 번 후루룩 먹고 말기도 어려운 이야기들을 꺼내 그것으로 한참을 우려내는 곰국을 끓인다? 나같이 마음이 좁아터진 쫄보에게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미오기네는 그것을 재료로 곰탕을 끓여댄다. 곰국은1번 끓이는 맛이 다르고, 2번 우려낸 맛이 다르다. 미오기네의 아픈 이야기들은 그렇게 곰국 재료로 쓰이며 미오기네만의 독특한 맛을 제조해낸다. 아프면서도 맛있다. 그렇게 미오기네 곰국은 추억 맛집이 되었다.
“마음을 열면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프롤로그 중에서
어렵고 학술적인 단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쓰인 그녀의 글은 아주 단순한 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위로를 건넨다. 잠시 숨을 멈추고 삶을 멈춘 채 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미오기네 오고 또 오게 되는 것이다.
미오기네 곰국에는 사람들의 기막힌 군상들로 가득하다. 곰국 속의 그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한껏 꾸미고 멀리 그리고 높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곁에 항상 있던 가족이거나 이웃이었다. 유명 작가가 썼다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하다. 그래서 미오기네 곰국은 한 번 맛보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함부로 맛보지 마시길 바란다. 중독을 각오하고 와야 하는 집이 미오기네다.
“지울 수 있는 과거는 없다. 다만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상처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굳은 살로 돋아나 생살보다 튼튼해진다. 같이 안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p. 174 공주미용실의 치정 난투극)
사람의 높낮이도, 돈의 유무도 가리지 않았던 오랜 장터 국밥 맛집처럼 오늘도 그녀는 활자와 추억으로 인생을 끓여낸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로 끓인 그 곰국을 후한 인심으로 여기 저기 퍼서 먹인다. 그리하여 나처럼 상처 입은 많은 이에게 힐링과 치유를 선사한다. 인심이 후한 집은 원래 입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미오기네 곰국은 희한하기도 해서 식지 않았다 280여 페이지의 활자 하나 하나가 작은 불꽃으로 모여 책의 온도가 끝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활자로 끓여낸 곰국도 맛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책 속에서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한 채 홀로 걷고 있는 미옥씨가 보였다. 오지랖이 태평양인 내게 너무나 힘이 들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발랄하게 세상을 향해 두 주먹을 날린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런 과거가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는다. 그런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정작 이 맛난 곰국을 즐겨야 할 사람은 미옥씨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쿨하게 끓여낸 곰국의 성찬(盛饌)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긴 채 본인은 이미 끓인 곰국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곰국을 미옥씨에게 먼저 가득 퍼서 먹이고 싶다.
영구 머리를 하고 다 늘어진 스웨터를 입고 있는 어린 미오기에게
생물 선생을 짝사랑해서 밤잠을 설치며 환경 도서를 읽던 단발머리의 미오기에게
입주 교사를 하며 모래밥을 먹던 대학생의 미오기에게
막 끓여낸 곰국을 여러 번 토렴해서 한 사발 가득 아슬아슬하게 퍼서 먹이고 싶다.
그러면 그녀는 핸드백에서 맑고 작은 소주잔을 꺼내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윤정씨! 여기 두꺼비도 한 병!!!”
혼자 먹기엔 정말 아까운 곰국이었다. 당분간 나를 찾고 싶거든 미오기네 곰국집으로 오시길 바란다. 나는 아마도 미오기네 앞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붙들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을테다.
2024. 5. 14. 화요일 화창한 봄, 미오기네 곰국을 붙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