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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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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은 깁니다. 해서 서두는 생략합니다. -_-;;

 

다수의 판단/결정/주장은 존중받을 만한가?

다수의 판단/결정/주장은 옳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그럴 힘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판단도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말은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수에 기반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다수란 것만으로는 어떤 옳음도 담보할 수 없다. 해서 그것이 다수로 드러났다는 것은 그저 모든 판단 중 하나가 두드러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마치 주사위를 굴려서 하나의 숫자가 결정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를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표현한다.

 

"크리톤, 다수의 사람이 가장 큰 해를 줄 수 있었으면 하네. 그러면 그들은 가장 큰 이로움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훌륭한 일일 것이네. 하지만 실상 그들은 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네. 그들은 사람을 분별있게도 무분별하게도 만들 수 없고,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기 때문이네." -44d.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어린아이로 비유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 아이의 노예처럼 무슨 말이든 따라야 한다고 해보자. 그럼 누군가 아이의 구미에 맞는 선물을 아이에게 흔들면서 "이것을 줄 테니 소크라테스에게 개 흉내를 내라고 말해주렴." 혹은 반대로 "소크라테스에게 덕성이란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해주렴." 이렇게 해서 아이가 그대로 따라 결정들을 내렸을 때 과연 그 판단과 결정들이 존중받을 만한가 말이다. 결국 그런 어린아이 변덕에 장단을 맞춘다는 것은 바람직할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모든 판단, 즉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쓴다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를 말함과 동시에 다수라고 해서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 즉 정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웅변가를 혐오하는 이유와 같다. 위에서 선물을 흔들며 아이를 꼬드기는 사람이 웅변가를 대변한다. 포퓰리즘 정치가인 것이다.-

 

다수에 기반한 판단, 그 자체만으로는 좋은 것일 수 없다. 다수의 판단이라는 것만으로 항상 좋은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다수의 결정이라 해서 항상 나쁜 결과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다수의 결정이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이라면 세상은 살기 편할 것이다.

 

이에 관해 또다른 플라톤의 저작인 <메넥세노스>에 이런 말이 나온다.

메넥세노스는 소크라테스가 경멸하는 대중 연설가들(웅변가, 정치가)의 연설문을 흉내내어 아테네를 찬양하는 추도문을 읊는 작품이다. ‘수수께끼 같다, 풍자적이다.’란 평가가 있다-

 

"어떤 자는 그것을 민주정체라고 부르고 어떤 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러나 실상 그것은 대중의 찬성이 수반된 최선자 정체(소수 엘리트정치)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는 항상 왕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때는 세습되었지만, 어떤 때는 선거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238c

 

이 문장에는 묘한 이질감이 있다. "민주정체라고 부르기도 하나 왕이 있다.“

3제국과 히틀러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이미 알려진 대로 철인통치 혹은 엘리트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한가? 민주정은 답 없는 우민정치로 결론내릴 뿐인 것인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이를 풀어가 보자.

 

통치할 자. , 현명한 자, 훌륭한 자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신이 확인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고대 동양의 천자들처럼 하늘이 점찍어 주었다는 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인가? 그 훌륭한 자라는 정통성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주변의 다른 뛰어난 엘리트들이?

그럼 그 주변의 다른 엘리트도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나?

-그 옆의 다른 엘리트가...

이런 식의 순환은 무한반복의 오류가 될 뿐이다.

 

이 논의는 분별력이 뛰어나야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한다.” 는 전제를 품고 있다. 이를테면 의사가 병의 치료에 관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알듯이 모든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닌 좋은 판단을 따라야 하고, 좋은 판단을 가진 사람의 분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좋은 판단을 가진 사람은 곧 신의 이치, 혹은 세상의 조화와도 같이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는 원칙'이다.

 

“...‘진리 그 자체가 뭐라고 말할 것인지 주목해야 하네.” -48a

 

자 그럼 그 분별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의사의 예시를 보고 이를 또다른 전문가주의나 엘리트주의로 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명사들만 덕성이 훌륭해지도록 문답을 한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아테네시민이라면 누구와도 대화를 하려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소수의 엘리트를 키우려한 게 아니라 시민 중에서 최선의 엘리트를 찾아낼 수 있고 또한 육성할 수 있는 토양 자체, 즉 일반 시민전체의 (보편성을 획득한) 식견이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웅변가들이 대중의 입맛에 맞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해도 그에 끌려다니지 않을 그런 시민, 그래서 아예 포퓰리즘이 설 자리가 없는 정치무대. “뽑힌 왕을 섬기는시민이 아니라, 높은 식견으로 훌륭한 자를 뽑아서 그 훌륭한 자가 또 시민을 훌륭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상호교류적인 정체를 바란 것이다. 해서 소크라테스, 그는 시민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묻거나, 대답할 뿐이다.

옳은 것은 어떻게 해도 옳다. 아직까지는... 다만 지금보다 나은 설명이 있다면 그때엔 그것이 옳다.” 그의 정의관이나 원칙은 절대적이지만 배타적이지 않다. 솔직한 대화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방성, 그렇게 확보된 인식의 공유(합의)를 통해 비로소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때에야 비로소 다수의 판단은 옳은 쪽으로 수렴해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집단지성의 발전단계와도 비슷하다. 한 때 놀라움을 안겨줬던 아고라에서의 집단지성의 목격이란 것은 찬성, 반대의 표수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의견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살이 붙고 불필요한 것은 떨어져나가고 세련된 윤곽을 잡아나가면서 보편성을 획득하던 그 경험이 놀라웠던 것이다. , 시민 상호간에 솔직하게논의가 오고가게 되면 훌륭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한 쪽에서 열등한 다른 쪽으로 교양이 흘러가는 식이 아니다. ‘친해야 대화가 통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면 친해진다.‘

 

앞서 이미 지적했지만 주고받는행위에 앞서 기본이 되는 것은 그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람이 진실해야지.’ 따위의 고루한 격언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수가 아무 의미없는 것처럼 주고받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 한다. 왜냐하면 주고받는 행위에서 솔직함이 빠지면 허위결과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실험에서 허위데이타를 재료로 결과를 도출해봐야 아무 것도 실증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5+x=9라는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4가 아닌 그 어떤 허위의 변수를 집어넣어 봐도 답은 찾아낼 수 없다.

 

이는 고스란히 표현의 자유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사회 구성원이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사회여건뿐 아니라 개인의 용기를 포괄하는 문제이다. 또한 이는 앞서 소크라테스가 모든 판단’(평판)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과도 맞닿아 있다. ‘평판혹은 남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구성원은 고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립적인 개인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 여건에서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사회이다. 그는 고루한 원리원칙주의자가 아니라 개인의 발전을 통한 사회발전의 수단으로서 그런 원칙이 필요했던 것이다.

 

 

논의를 넘어가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요인을 살펴보자.

왜 소크라테스는 순순히 독배를 마셨는가?

그는 잘못된 판결에도 순순히 따름으로써 시민불복종권이나 저항권의 개념은 거부한 것인가?

이는 옳은 것은 어찌해도 옳다.’는 소신과 상충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변명>에서도 자기 스스로 밝혔듯이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5인의 장군을 처벌하길 거부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법률의 명을 거부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률을 따르는 모습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허나 이건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어느 때나 자신이 밝힌 원칙을 따랐을 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가 추구하는 지혜(이는 정의와도 통하는 개념이다)는 상호간 대화를 통해 더 나아갈 것이 없는 치밀하게 합의된 보편성에 기반한다. 즉 진리(이는 곧 정의이다)라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법률 사이에도 이러한 약속이 성립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다. 사회계약론의 원조다.) 그는 국가의 어떠한 명령이라도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허나 이는 물론 그가 합의한 정의로운 국가이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외의 국가를 한번도 여행하지도 동경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라 주장한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률이 정당하다고 합의한 것인가? 악법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

 

이 논의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문장의 개별 단어의 의미에 집착해서는 진전이 어렵다. 일단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님에도 단어에 의한 과한 축약으로 본질을 왜곡하는 표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합의한 나라의 법률을 좋아했다. 당시의 재판정이 굴러가는 모습은(현란한 수사로 본질을 호도하고 사람을 꼬드기는 형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토론이 오고가는 재판이라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게 봤다. 기실 재판이라는 형식은 그의 문답법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테네의 정체가 굴러가는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 게임의 룰은 악하지가 않다. 허나 그 룰을 운용하는 사람이 정의롭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을 응징해야하는데 그 방법이 부당한 방법뿐이어서 게임의 룰을 해쳐야 한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상태에서 당신이 떠나간다면, 당신은 정의롭지 못한 일을 당한 상태로 떠나갈 것이오. 법률인 우리한테서가 아니라 사람들한테서그런 일을 당한 상태로 말이오.” -54c

 

어떠한 좋은 제도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타락하면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부정을 당하는 것보다 부정을 행하는 것이 더 나쁘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합의된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나는 어느 쪽도 원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불의를 저지르거나 불의를 당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나는 불의를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쪽을 선택할 거네.” -고르기아스 469c

 

그의 행동을 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군대를 예로 들 수 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어떠한 것이든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지만 부당한 명령까지 복종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를 소크라테스식으로 표현하면 괴로운 것나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조국이 두들겨 맞으라면 맞고...”라고 표현한 것은 괴로운 것, 즉 엄격한 훈련, 전열의 사수 등의 필요한 고난을 견딘다는 의미이며, ‘부정을 행하라.’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처지는 고난 중에서 어쩔 수 없이 부정을 당하는입장이며, 그렇다 해도 도주하는 것은 부정을 행하는것이 된다. (당연히 그에 앞서 부당한 것이 닥쳐오는 그 순간에 그것을 피하거나 맞서 대항할 것을 긍정한다.) 단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의 사후처리로써 정당한 응징과 정당하지 않은 보복(부정을 행함)을 구분할 따름이다.

 

100여 페이지짜리 책에 본문32페이지에 불과한(그것도 본문에 각주가 붙어서 양이 늘어난) 작품에 이리 길고 힘들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절대 고르기아스는 쓰지 말아야겠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제끼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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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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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사랑이란 무엇일까...란 일드가 있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고귀한 부류의 인간', 즉 <고등유민>이라 지칭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백수한량이다.


그 <고등유민>의 원조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다이스케다.

다이스케는 '내면의 성실과 열의'를 비웃으며, 목적있는 삶을 부정하고, 생활을 위한 노동을 저열하다 여기며,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


집안의 결혼권유같이 부담스런 일에 그는 항상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그의 태도는 어찌해야할지 모름에서 비롯한 우유부단함도 아니요, 어느 것이 더 유리할는지 재느라 계산기를 두드리는 약삭빠름도 아니다. 가부를 명확히 했을 때 부딪힐 상황이 싫어서 문제를 미룰 따름이다. 상대가 지쳐 제풀에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게다.


고귀한 생활욕을 만족시키려 고등유민의 삶을 살지만 정작 그 굶주린 행동을 실행시킬 용기와 흥미가 부족하다. 그는 달관했지만 동시에 권태에 빠져버린다. 그는 이를 진화의 이면엔 퇴보가 수반된다며 씁쓸해 한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에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그는 창문을 열어젖힌다.


창문을 열어젖힌 그는 성실과 열의로 삶의 목적을 정하고 기꺼이 생활을 위한 노동에 뛰어들려 한다.


자, 그럼 그는 이전의 그의 삶을 부정하고 배반한 것인가?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그가 말하는 성실과 열의는 상대에 따라 어우러져 생기고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지, 내면에 고유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신의 안녕을 위한 도구로써의 성실과 열의는 종종 비도덕적이다. 그건 저 너무나 성실한 MB의 예에서도 알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일개미같은 삶' 내지는 '저녁이 없는 삶'같은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노동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만약 10시간의 노동을 6시간으로 줄여주겠다면 당신은 거부할텐가? 물론 급여는 그대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줄이고 싶은 노동' 이라는 명제, 그 어디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논할 수 있나?  혹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꼼수와 부정을 구사하려는 생활전선, 그 어디에서 도덕을 논할 수 있을까?

뭔가 남는 것으로만 가치가 매겨지는 노동이란 이렇듯 저열할 수 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면 물질적 반대급부가 없는 노동은 천대받기 때문이다.


다음의 소설 속 문장으로 이제까지의 주장을 갈음하고 이어서 주인공의 배반(?)을 마무리지어 보자.


-그는 인간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로 인간은 태어나서야 비로소 어떤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태어날 때 이미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자기의 존재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천하에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다이스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걷고 싶으니까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생각하고 싶으니까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걷거나 생각하는 것은 보행과 사색의 타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이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한낱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p.180-


달관 내지는 권태의 중간에서 어영부영하던 다이스케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다. '예스 or 노'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그가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닌 제3의 선택, 그것도 무지막지한 비바람이 덮치게 될 창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고귀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방황하던 그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찾아내자 비로소 성실과 열의를 갖게되고, 좋아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삶을 향해 달려든다. 그때에야 비로소 노동은 저열해도 괜찮은 것이 된다. 그 자체로 고귀하진 않지만 일신의 안녕을 위해 끝간데없이 타락하지는 않을 노동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성향으로 읽히던 이 작품은 이렇게 주인공이 거칠게 세상에 부딪히면서 현실감각을 가지게 된다. 걷지않고 생각만 하던 그가 걷기 시작하면서 끝을 맺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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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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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내기 참 곤혹스러웠다.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맘엔 와닿지 않는 글... '노벨문학상 역시 칸느처럼 어느정도 명성을 쌓으면 공로상처럼 주는,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내지는 '이 작품으로 상 받은 건 아니겠지?' 따위의 시덥잖은 망상이나 떠올릴 정도였다.

제목은 참 읽고싶게 지었는데...


엄마에게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원수, 짐승, 괴물 등으로 불리고 그 약동하는 진동이 느껴지는 게 징그럽고 괴로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약을 먹고 '나'는 영향없이 '원수'만 잠재워야하는 그런 불청객이다. 아이 여섯을, 혹은 그 이상의 많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던 엄마가, 그 계획표상 휴가기간이어야 할 시간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그나마도 이쁜 구석 하나없는 다섯째 미운 아이.


"행복할거야." 라니...

아이는 내 행복의 도구인가? 가정은 내 행복의 미쟝센인가? 계획표대로 나오지 않은 불청객같은 아이처럼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되려 느닷없는 반가운 손님같은 행복이 드문드문 아쉽게 왔다갈 뿐이다.


엄마는 아이를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가여운 짐승을 불쌍히 여겨 다루듯 하는 게 최고의 상냥함이다.

'어떻게든 길들여서 소란만 없으면 좋을텐데, 그러면 다시 사람들이 놀러오고, 행복해질텐데. 아니 그저 사라져줬으면... 내 손에 더러운 것 묻히지 않고 혼자 사라져줬으면...'


다섯째아이는 수년째 병치레하는 노모요, 난치병걸린 자식이요, 망나니짓 일삼는 남부끄러운 가족이다. 게다가 태어나기 전부터 미운, 가족간의 유대라고는 겪어본 적이 없는 철저한 골칫덩이.


당신이라면 어쩌겠는가?

버릴까? 품는 척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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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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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들이 항상 그러하듯 ... 짧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 또한 204쪽 중 본문은 68쪽이며 그 중 대략 2/3이 각주이니 실 쪽수는 46쪽 정도이다.


 주석은 본문 하단에 첨부된 각주와 본문이 끝나고 책 뒤편에 실린 미주로 나뉘는데 각주는 지명, 인명, 역사적사건들에 관한 간단 설명 등 원만한 독서흐름을 위한 배경설명들 위주이며 미주는 개별단어의 번역이나 의미와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어 텍스트를 보다 깊게 분석하며 읽는 이에게 유용하다.
 그 외 작품안내(서문과 해설), 작품분절(글의 구성요약) 등이 본문앞에 짧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본문보다 부록이 많은 책이다. 실상 이런 책은 읽기가 꺼려지게 마련이다. 특히나 그게 '고전'이라니... 허나 이런 거 다 제끼고 본문만 읽어도 이 책은 쉽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유일하게 대중을 상대로한 일방적인 연설에 가까움에도 가장 현장감있고 가장 논리적인 대화가 많기 때문이다. ('향연'만 해도 사변적이거나 신화적인 이야기들, 소크라테스 이외 인물들의 주장들이 많다.)

 작품의 배경이 재판정인 탓일 게다. 읽으면서 노천극장같은 넓은 공간, 객석에 앉은 방청객들, 배심원들, 평의회의원들과 중앙 무대에 있는 소크라테스와 한 켠에 원고들, 사방에서 울리는 야유와 지지의 언성들을 상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중간중간 청중에게 '소란을 벌이지 말아달라.' 거나 '조용히 해주십시오.' 등의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장면이 그려진다.


 플라톤의 고전들을 읽기전에는 그것이 가진 '철학'이란 카테고리와 기원전에 쓰인 오래묵은 고전이란 타이틀이 주늑들게 했다. 동양고전들처럼 함축적인 말이어서 수수께끼를 풀 듯 읽어야 하나 싶어서 말이다. (철학적 언어의 끝은 아포리즘일 수 밖에 없다지만...)


 헌데 지금의 고민과 지금의 논리와 지금의 세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옳은 말을 하는 이가 매도당하는 사태, 공적영역에서는 특히나...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단언한다. 기실 그의 항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항변이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의 보수성이 짙어질수록 억압받는다. 지금도 그렇고 2000년전에도 그랬다.

비공식고발인 "천상과 지하를 탐구하며 약한 논변을 강화하며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사기꾼으로 현란한 언변으로 남을 꼬인다.'는 식의 인신공격을 통해 개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저열한 수법으로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의 공식기소죄목인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않고 이를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를 망친다." 는 것은 이른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 쯤 되는 것이다. ('빨갱이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 이럴수가! 2000년전에도 이랬다니...'

새로움과 기시감이 혼재하는 이 당혹감이라니...


생동하며 발전하는 사회는 발랄한 표현에도 관용적이게 마련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사회는 정체되고 퇴보하는 사회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다른 것을 억압한다. 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정체하고 퇴보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죽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것, 이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했듯이, 일단 손 내밀어봐야 한다. 사람에게든 변화에든...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테네를 욕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되려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지. 과연 우리는 '지옥불반도', '헬조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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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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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답적이지 않고 현실에 밀착한 고민과 사색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독자로 하여금 철학하게 만드는 작품. 인간의 나약하고 비굴하고 추한 그 모든 것들을 보여주면서 그래도 눈 돌리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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