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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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사랑이란 무엇일까...란 일드가 있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고귀한 부류의 인간', 즉 <고등유민>이라 지칭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백수한량이다.


그 <고등유민>의 원조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다이스케다.

다이스케는 '내면의 성실과 열의'를 비웃으며, 목적있는 삶을 부정하고, 생활을 위한 노동을 저열하다 여기며,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


집안의 결혼권유같이 부담스런 일에 그는 항상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그의 태도는 어찌해야할지 모름에서 비롯한 우유부단함도 아니요, 어느 것이 더 유리할는지 재느라 계산기를 두드리는 약삭빠름도 아니다. 가부를 명확히 했을 때 부딪힐 상황이 싫어서 문제를 미룰 따름이다. 상대가 지쳐 제풀에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게다.


고귀한 생활욕을 만족시키려 고등유민의 삶을 살지만 정작 그 굶주린 행동을 실행시킬 용기와 흥미가 부족하다. 그는 달관했지만 동시에 권태에 빠져버린다. 그는 이를 진화의 이면엔 퇴보가 수반된다며 씁쓸해 한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에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그는 창문을 열어젖힌다.


창문을 열어젖힌 그는 성실과 열의로 삶의 목적을 정하고 기꺼이 생활을 위한 노동에 뛰어들려 한다.


자, 그럼 그는 이전의 그의 삶을 부정하고 배반한 것인가?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그가 말하는 성실과 열의는 상대에 따라 어우러져 생기고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지, 내면에 고유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신의 안녕을 위한 도구로써의 성실과 열의는 종종 비도덕적이다. 그건 저 너무나 성실한 MB의 예에서도 알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일개미같은 삶' 내지는 '저녁이 없는 삶'같은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노동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만약 10시간의 노동을 6시간으로 줄여주겠다면 당신은 거부할텐가? 물론 급여는 그대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줄이고 싶은 노동' 이라는 명제, 그 어디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논할 수 있나?  혹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꼼수와 부정을 구사하려는 생활전선, 그 어디에서 도덕을 논할 수 있을까?

뭔가 남는 것으로만 가치가 매겨지는 노동이란 이렇듯 저열할 수 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면 물질적 반대급부가 없는 노동은 천대받기 때문이다.


다음의 소설 속 문장으로 이제까지의 주장을 갈음하고 이어서 주인공의 배반(?)을 마무리지어 보자.


-그는 인간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로 인간은 태어나서야 비로소 어떤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태어날 때 이미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자기의 존재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천하에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다이스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걷고 싶으니까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생각하고 싶으니까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걷거나 생각하는 것은 보행과 사색의 타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이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한낱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p.180-


달관 내지는 권태의 중간에서 어영부영하던 다이스케는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다. '예스 or 노'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그가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닌 제3의 선택, 그것도 무지막지한 비바람이 덮치게 될 창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고귀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방황하던 그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찾아내자 비로소 성실과 열의를 갖게되고, 좋아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삶을 향해 달려든다. 그때에야 비로소 노동은 저열해도 괜찮은 것이 된다. 그 자체로 고귀하진 않지만 일신의 안녕을 위해 끝간데없이 타락하지는 않을 노동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성향으로 읽히던 이 작품은 이렇게 주인공이 거칠게 세상에 부딪히면서 현실감각을 가지게 된다. 걷지않고 생각만 하던 그가 걷기 시작하면서 끝을 맺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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