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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일기 1996 -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
윤구병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11월
평점 :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면 좋은 자료가 될 책이다.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이상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여러 가지다.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 이게 고슴도치 같은 거야.” 하고 말하지만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조금씩 지혜를 얻고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가슴 뭉클하다.
나 또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자그마한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변산공동체가 꿈꾸는 것 같은 큰 뜻을 품지 않았지만 유기농을 지으며 죄를 덜 짓는 삶을 살고 싶었다. 외환위기가 찾아온 이듬해던가. 드디어 의형제 두 명과 함께 셋이서 귀농하기로 뜻을 모았다. 직접 땅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지만 셋의 답사는 오붓한 여행으로 그치고 말았다. 변명이지만 셋 다 이미 결혼을 한 뒤이고 일부가 같이 사는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간절함이 부족한 게 결행을 하지 못한 진짜 까닭이었으리라.
귀농과 자그마한 마을 공동체에 대한 미련이 사그라들지 않아 딸아이가 다니던 고등학교 학부모들과 함께 농촌에 들어가는 것을 의논했다. 그 중 일부는 지금 시골에 살아갈 터전을 함께 마련하여 착착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에도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용기가 없는 거겠지. 그렇다고 하여 아주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동체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과 해결,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려움보다는 농촌에 살면서 얻게 되는 자연의 신비로움, 덕분에 움트는 맑은 정신과 튼튼한 몸의 기운, 지혜로움, 신명 따위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간다. 동경하게 된다.
고목나무(당산나무) 밑에 가서 나무 위에 열린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뭇등걸을 안고 나무에 볼을 댔다. 따뜻한 느낌이 든다. 몇 발자국 떨어져서 땅에 엎드려 당산나무신령님께 오체투지를 했다. (68쪽)
1996년 3월 11일 일기에 나오는 시 「봄바람」( “아무리 매워도 / 그 안에 / 칼끝이 들어 있지 / 않다. / 봄바람 / 땅을 보면 / 안다. / 서릿발이 안 돋아 / 있다. / 웅덩이 물을 보면 / 안다. / 살얼음이 / 없다.”)이나, 1996년 5월 27일 일기에 나오는 「당산할매의 젖꼭지」(“당산할매는 젖꼭지가 참 많다. / 해도, 바람도, 흙도, 물도 / 그 젖꼭지 물고 젖을 먹는다. // 햇볕이 따뜻한 것도 / 물맛이 단 것도 / 바람이 싱싱한 것도 / 흙이 부드러운 것도 / 다 당산할매가 젖 먹여 키워서 그렇다. // 내가 당산할매한테 / “할무이, 나도 젖 좀 줘” / 했더니, / “다 큰 놈이 무슨 젖 타령이여, / 저리 가” / 한다) 같은 시는 또 어떤가.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만 노래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는 점차 참 농사꾼이 되어 가는 윤구병, 공동체학교를 야무지게 준비하는 교육자 윤구병, 우주를 생각하고 병든 세상을 고치려는 철학자 윤구병, 생활비를 보태려고 원고를 쓰는 글쟁이 윤구병, 마음을 닦으며 길 위에 서 있는 수도자 윤구병, 갈등 조정자 윤구병, 노래하고 춤추는 윤구병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 윤구병의 모습이 가장 반갑다. 그것은 일정 부분 자연에 빚지고 있는 것일 터 점차 농사꾼이 되어 갈수록 시인 윤구병은 더 큰 시적 울림을 주지 않을까. 앞으로도 계속 나올 일기를 벌써부터 기다리는 까닭이다.